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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직딩 Aug 23. 2021

먹여 살리는 사랑


충무로역 봉지 할머니(사진출처 : SBS '궁금한이야기Y' 방송 캡처, 2014.1.3. 방영분)


충무로역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마 이 할머니를 모르는 분이 없을 듯합니다.


얼굴이 발 끝에 가 있을 정도로 허리가 굽어있고, 늘 청테이프가 감긴 봉투 10여 개를 들고, 아니, 바닥에 끌고 다니죠.


할머니는 주로 출근길에 보게 되는데 역 한켠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칩니다.


"여자는 물건이 아니다."

"아무리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사람을 건드리면 안 돼."

"술 처먹지 마라."

"남자들아, 여자들 대할 때 너희 엄마처럼 대해라. 너네 엄마가 다 여자다."


얼마나 쓰라린 아픔과 깊은 마음의 상처가 있길래 몸과 정신이 저렇게나 정상적인 모습에서 멀어졌을까요?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같은 행색을 하고 지하철역에 쭈그리고 앉아 밥을 먹거나, 졸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는 할머니를 볼 때면 늘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너무 자주 접하는 광경이기에, 마음 한켠에 안타까움이 생기지만 내가 나서서 도울 방도가 없기에 더욱 외면하고 싶은 광경을 못 본 체하며, 또 그의 외침을 못 들은 체하며 발걸음을 옮길 뿐입니다.




아이가 지난주 목요일 밤부터 열이 오르며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열이 39.7도까지 오르더군요. 이 시국에 열이라니…


소아과에 갔더니 단순 열감기가 걸린 것 같다고 합니다. 피검사를 해도 염증 수치는 낮았고, 노파심에 저와 남편은 코로나 검사도 받았죠.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먹이고, 3가지 종류의 해열제를 교차 복용시켜도 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이 되었네요.


다행히 아이는 37도 후반대까지 열이 떨어졌지만, 컨디션이 계속 안 좋은지 매달리고 떼쓰는 아이를 떼놓고 무거운 마음과 발걸음을 힘겹게 떼어 출근을 했죠. 평소보다 출근시간이 조금 늦어졌고, 9시 전에 사무실에 들어가기 위해 충무로역에 내려서 급하게 계단을 올랐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도 할머니는 계단 한쪽에서 십여 개의 비닐봉지를 옆에 두고 앉아계시더군요. 그리고는 소리쳤습니다.


뽀뽀하는 게 사랑이 아니야
사랑은 먹여 살리는 거야


충무로역으로 출근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처음 듣는 말이었고, 사무실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아서도 계속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맞습니다.

끌어안고, 뽀뽀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책임도 지고, 내 것을 내어주기도 하며, 끝까지 애쓰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이가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아이의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대지만, 그것만으로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열이 끓는 아이 옆에서 한밤 중에도 따뜻한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밤이든 낮이든 해열제를 종류별로 시간 간격을 체크해가며 먹이고,

고열로 힘들어하는 아이의 떼를 받아주고 요구를 들어주며,

입맛이 없어서 밥 숟가락을 앞에 두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아이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갖은 애교와 술수로 구슬리며 입을 벌리게 만들고,

아이는 아프지만 밥벌이를 하기 위해, 또 내 커리어를 지키며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엄마의 모습으로 아이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터로 향하는 것.

이 것이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생기더군요.


'먹여 살리는 것'이 단순히 배를 채우고 생명을 연장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아이의 몸과 마음과 생각에 양질의 영양분을 공급하고 잘 자랄 수 있도록 돕는 어른다운 어른이 되고자 애쓰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해보고자 합니다.




주가는 뚝뚝 떨어지는데 계속 상한가를 치던 아이의 열도  열꽃을 피우며 이제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은 아프고 나면 훌쩍 커버린다고 하죠? 그런데 자기주장만 커버렸는지 생떼가 엄청 늘어버렸네요.


엉덩이를 때려주고 싶은 순간들이 많아지고, 동시에 마음에 새겨지는 ‘참을 인’ 자의 수도 늘어납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아무리 내 뱃속에서 나왔어도 무조건 사랑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두렵기도 합니다.


"사랑은 먹여 살리는 거야"라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아픔과 상처 속에서 터져 나온 한 마디의 말로 다시 에너지를 채우고, 힘껏 사랑해보겠노라고 다짐해봅니다.


오은영 박사가 '육아의 목표는 자립'이라고 했죠? 아이가 자립할 때까지 잘 먹여살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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