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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매이 Apr 03. 2021

나는 앤 해서웨이다

 서울에 있는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나도 드디어 빌딩 숲을 오가는 커리어우먼이 되는구나!'라는 기쁨도 잠시, 내 하루 일과는 멀뚱멀뚱 모니터만 보다가 회사 데이터 관리시스템에 저장되어있는 전임자의 문서를 뒤적거리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저 뭐 할 거 없을까요?'라고 옆자리 과장님한테 물어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나 빼고 다 바빠. 다들 바쁜데 '일 좀 시켜달라'라고 매번 말하는 것도 민폐 같았다. 그렇지만 하릴없이 사무실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이참에 자소서를 써볼까, 라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갔지만 갓 입사한 애가 다른 직장 가겠다고 대놓고 자소서를 쓰는 것도 영 아닌 것 같았다.(라고 내 안의 소심이가 말했다. 사실 나에게 아무도 관심 없다.)


 "혹시 바빠요?"

 헉. 이건 나한테 일을 주겠다는 신호다. 

 "아뇨, 저 일 주세요. 제발!"


 그렇게 나의 첫 업무가 시작됐다. 그 날은 회사 근처 큰 카페에서 사업 입찰 심사가 있는 날이었다. 나는 심사위원들이 심사장에 도착했는지 확인하고, 체온을 재고, 그들이 마실 음료 주문을 받고, 음료가 나오면 그 음료를 시킨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일을 했다. 무척 단순한 일 같아 보이지만, 나에게는 중요했다. 입사한 곳에서의 첫 업무. 문제없이 잘 해내고 싶었다. 심사 전 점심시간에 빵을 먹는데, 빵의 달달한 설탕 입자가 거친 모래알이 되어 입에서 굴러다니는 듯했다. 뭐야, 나 긴장한 거야?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1년 남짓한 사회생활 경력이 무색해져 버린 내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ㅇㅇㅇ 위원님이시죠? 체온 한번 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명철에 사인 한 번 해주세요. 음료는 뭐로 하시겠어요? 아, 아메리카노요? 따뜻한 걸로 드릴까요, 차가운 걸로 드릴까요? ㅁㅁㅁ 위원님은 딸기 셰이크요?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말씀하셨죠? 여기 나왔습니다. 과장님, 업체 발표자 아직 도착 안 했는데요, 전화해볼까요? 알겠습니다. 


 정신없이 네 시간이 훌쩍 지났다. 심사가 끝나자마자, 발과 종아리에 피로가 몰려왔다. 얇은 가죽 로퍼를 신고 계속 걷거나 서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퇴근 후 집에 와서 얼얼한 종아리를 베개에 올려놓고 누워있는데, 갑자기 현실 자각 타임이 왔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대학생들에게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홍보영상을 기획하는 일을 했는데, 입신양명의 꿈을 안고 올라온 서울에서의 첫 업무가 '커피 셔틀'이라니… 커리어 우먼과는 완전히 멀어진 것만 같았다. 


 "언니, 그럴 땐 언니가 앤 해서웨이가 됐다고 생각해."


 동생이 말하는 앤 해서웨이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그가 연기한 '앤드리아'를 말한다. 앤드리아는 악명 높은 편집장 미란다의 잡지사에 입사해 그의 비서로 일한다. 앤드리아는 매일 아침 커피 배달은 물론, 깐깐한 미란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심부름도 해야 하고, 밀려드는 전화도 받아야 한다. 심지어 미란다의 쌍둥이 학교 숙제까지. 어쩌면 '잡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일을 앤드리아는 꿋꿋이 해낸다. 그런 그녀가 사회생활 쪼렙 같아 보이는가? 남들 보기에 보잘것없는 일을 하는 것 같은가? 자문해보면, 절대! 아니다. 앤드리아는 자신의 일에 진심이다.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오른다'는 유명한 산악인의 말처럼, 일을 하면서 업무 중요도를 비교하거나 자신의 쭈구리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 그냥 ‘내 일’이니까 한다. 잡생각 없이 잡일을 묵묵히 처리하는 모습이 오히려 대도시 직장인의 숙명을 겸허하게, 또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멋진 커리어우먼처럼 보인다. 


 다이어리를 보니, 회의가 여러 개 잡혀있는 날이다. 오늘도 편하게 앉아있기는 글렀다. 

 출근길, 난 마법의 주문을 마음속으로 외친다. 


 "난 앤 해서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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