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태어난 지 백일이 막 지났을 무렵의 일이다. 잠든 아기를 방에 눕히고 짝꿍과 한참 늦어버린 저녁을 먹으면서 말했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지금 쉬고 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당연히 회사를 찾고 다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경력이 있으니 자신 있다고도 확신했는데 막상 낳고 키우다보니 이전처럼 9 to 6 회사를 다닌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회사를 못 다닐 것 같다"는 나의 목소리에는 어떤 아쉬움이나 미련도 섞여 있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짝꿍은 달랐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내 결론을 듣더니 안타까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왜 회사를 '못' 간다고만 생각하는 거야, 못 가는 게 아니라 '안' 가는 거지. 안간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 회사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안 가는 거라고."
그는 내가 회사를 다녀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나 강박 같은 게 있는 사람 같아 보인다고 말했다. 회사를 안 다녀도 지금 일하듯이 회사 밖에서 할 수 있는 일, 그 동안 해보고 싶었거나 새롭게 해보고 싶은 일을 찾을 기회로 생각하면 될 텐데, 전제부터 이미 회사라는 틀을 정해 둔 사람, 회사를 다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다고도 했던 것 같다.
그의 말에 아니라고 손사래 쳤지만 사실 맞았다. 쉬면서 다음을 모색해보겠다고 퇴사하고는 그만 둔 다음날부터 회사 다닐 때와 똑같이 책상 앞에 출근해서 포트폴리오를 만들던 게 바로 나였으니까. 나태해지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에 9 to 6로 시간을 정해두고 무조건 앉았다. 12시가 되면 회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점심을 먹었다. 좀 더 쉬거나 아예 놀아도 누가 뭐랄 사람이 전혀 없는데도 1시가 되면 습관처럼 다시 책상에 앉았다. 지금가지 일했던 파일들을 하나씩 열어보고 PPT 장표를 만들다 막히는 부분이 생기면 머리를 부여잡거나 한숨을 내쉬기를 반복했던 1년 전 나는, 회사 밖을 나온 내가 많이 불안했던 것 같다. 그리고 회사를 다녀야만 '사람 구실'을 한다고, 밥벌이 하는 온전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생뚱맞지만 나의 이런 불안을 잠재워준 건 다름 아닌 '임신'이었다. 퇴사한 지 얼마 안돼 우리에게 찾아온 생명. 회사를 다닐 적에는 번번이 짧은 만남으로 끝나고 말았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뒤 나는 '왜 다시 무언가 해보려는 지금일까' 아쉬워하면서도 사실 많이 안도했다. 백수인 나를 합리화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는 까닭에. 일하고 싶지만 근무한 지 1년도 안 돼 출산 휴가를 가야 하는 임산부를 고용할 회사는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나의 퇴사는 나의 임신을 위해 나도 모르게 신이 계획한 것이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나의 불안은 자연스레 옅어졌다.
물론 다행히 계속 일할 기회가 있었다는 점도 도움이 됐다. 평생교육계 소식을 전하는 웹진 프리랜서 에디터로 합류할 수 있었던 것. 매일 출근할 필요 없이 정해진 날짜에 온라인 회의를 하고, 전화와 카톡으로 업무를 논의하며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일은 임산부로 내 컨디션을 살피고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경력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내게 찾아온 또 다른 행운 같았다. '밥벌이' 못하는 사람으로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 일을 완전히 손 놓고 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누구에게든 떳떳할 수 있었다.
다만 내 마음의 평화는 유효기간이 길지 않았다. 내 몸에서 방 뺀 건 분명 아기였는데, 느긋하고 자신만만했던 마음까지 함께 방 탈출한 것인지. '다시 일을 못하면 어쩌지', '감이 떨어진 건 아닐까', '이대로 경력이 끊겨 전업맘이 되는 건 아닐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초조해했으니까.
"육아에 집중해. 그걸 온전히 잘 즐기고 몰입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라고 다정하게 건네는 선배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여전히 요동쳤다. 아기를 낳으면 내 세계에 하나의 세계가 더 만들어지는, 플러스가 되는 인생인 줄 알았더니 실제로는 내 세계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인생인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아기를 생각하면 너무 뭉클하고 기쁘고 좋은데 그것과 별개의 또 다른 감정이 분명 존재했다.
회사를 못 다닐 것 같다고 결론 내린 날로부터 어느 덧 오십여 일이 지났다. 그 말을 내뱉었던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아기가 낮잠 자는 틈틈이 노트북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며 시간을 쪼개 일하고 있다. 버거울 때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 없을지 같은 질문을 두고 고민하지 않는다. 나의 아까운 시간만 소모시키는 불필요한 질문인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는 거다. 눈앞에 닥친 일부터 우선 순위를 정해 해결하기. 그리고 해결할 수 없다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거다. '일류여성' 뉴스레터를 시작하는 것도 같은 연장선 상에 있다. 나의 고민과 생각을 남기며 길을 찾아보는 것.
일하고 싶은 마음이 방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언제일지 모를 미래의 어느 시점에 진짜 말하게 될 지도 모른다. "회사 못 가는 게 아니라 안 가는 거야!"
위 내용은 메일리 뉴스레터 '일류여성'으로 발행된 내용입니다. 여자 셋이 돌아가면서 매주 금요일 편지를 보내고 있고, 저는 3주에 한 번 편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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