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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Sep 03. 2023

처서 매직

2023년 8월 월간 일기

올여름에 함께 한 노래


유튜브 프리미엄은 훌륭하다. 매 달 만 원의 구독료가 한 개도 아깝지 않다. 특히 유튜브 뮤직이라는 세계를 열면서 음악을 듣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 매력 중 하나는 가끔씩 지난 플레이리스트를 되돌아보게 해준다는 점이다. 올해도 역시나 역대급 더위였고 땀이 비 오듯 하다가 그늘에 잠시 앉아  이어폰을 꽂고 머릿속을 시원한 바람이 통과하는 듯한 노래들이 함께여서 좋았다.


본가인 청주에는 나름 유명한 '올리브 팜스'라는 지역 소재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다. 나는 십여 년 전 거기서 알바를 했고 한 친구를 만났다. 일을 가르쳐줘야 하는데 본인이 하는 걸 보여주다가 일을 다 해 부렸던 그 녀석은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몇 개의 회사를 거친 뒤에도 인연이 이어져 13년 지기가 되었다. 이사 전에 짐을 창주로 옮긴 뒤 다시 하남으로 가는 길, 동탄에 사는 녀석과 만났다. 방을 빼면서 빌렸던 플스를 반납하고 빌려줬던 추리 소설을 돌려받았다. 작년에 이직한 회사에서 월급도 올랐고 야근 수당도 잘 챙겨 준다고 자랑하던 녀석은 저녁을 사주고, 내일 아침도 먹으라고 파리바게뜨에서 골든벨을 울렸다. 패밀리 레스토랑 주방에서 수십 장의 접시를 빠르게 닦으면서 나에게 일을 가르쳐주던 녀석은 그때보다 살이 쪘고 여전히 노잼이지만 진국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누군가 내 주위에 제일 착실한 삶을 사는 게 누군지 물어본다면 나는 그 녀석의 이름을 말할 것이다. 빵을 한 가득 안고 집에 데려다 주는 차 안에서 요즘 자주 듣는다는 노래라고 이 노래를 같이 들었다. 오마이걸에 푹 빠졌던 녀석답게 발랄한 노래였다. 그때부터 나도 이상하게 이 노래를 계속 듣는다. 나와 전혀 맞지 않는 녀석과 10년 넘게 관계를 이어온 것처럼.


홀리듯 반복해서 들었다. 올여름에만 100번도 넘게 들었던 것 같다. 코흘리개 시절 야한 장면 좀 보겠다고 몰래 본 영화 <친구> 속에 이 노래를 부르는 신이 있다. 친구 4인방이 여학고 축제에 놀러 갔을 때 보았던 무대에서 처음 들은 이 멜로디는 머릿속 한편에 오랫동안 새겨져 있었다. 오래된 찻집, 우드 톤의 카페에서 종종 나왔던 이 멜로디가 갑자기 유튜브 알고리즘에 떴다. 그렇게 듣기 시작한 노래는 올해 여름을 함께 했다. 서글프지만 깊은 멜로디, 판소리에 화성을 넣으면 이런 느낌일까 싶은 보컬, 가사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소극장의 불이 꺼진 연극 무대. 그 빈 공간에 흐르는 정적.


 쓰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인 희수가 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설정을 떠올렸다. '나'와 함께 코인 노래방에서 희수는 시선을 내리깐 채 멜로디 하나하나를 되새기며 가사를 따라 부른다. 희수스러운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이 소설이 출간된다면, 또 읽어주는 독자가 제법 된다면, 그 장면을 떠올리며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를 사람이 있을까?


정적만이, 남아있죠.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희수는 눈을 감고 노래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치 옆에 내가 없는 것처럼.



처서매직


처서의 마법이라는 말이 있단다. 그녀는 올해 처서의 마법은 이뤄지기 어렵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처서의 마법이란 말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24 절기 중 하나인 처서가 지나면 무더웠던 여름도 마법처럼 시원해진다는 의미란다. 주위의 몇몇에게 물어보니 누군가는 익숙한 듯 말하고, 또 누근가는 그런 말이 있었냐는 듯 눈을 크게 뜨는 걸 보니 유행어는 아닌 것 같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도는 말 같았다. 머무를 처에 더울 서, 모기도 처서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단다. 처서의 마법, 처서 매직이란 말이 무언가 귀엽게 느껴져 계속 되네였다. 그 사이 8월 23일 즈음에 내린 비와 함께 무더웠던 여름의 열기가 꺾이고 일주일이 지나자 시원해졌다. 처서 매직이 일주일 연착한 건가 싶었다. 올해 여름도 그렇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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