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eedom to Transcend Aug 22. 2024

미국집 화재경보기 사건

지난 글에서 얘기했듯이 정신적으로 지쳤던 나는 단순한 집안일에조차 의욕을 잃고 말았는데, 그래도 내가 이 집을 가꾸지 않으면 아무도 이 집을 가꾸지 않을 테니 스스로 조막만 한 힘이라도 내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일 청소가 시급한 곳부터 정리를 시작했다. 크지 않은 구역이었지만 짐이 많았고, 한 번 청소를 시작하니 꼼꼼하게 해야겠다 싶어서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억지로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시작한 청소였지만, 한 구역을 깨끗하게 하고 나니 신기하게 또 기분이 전환되고 다른 구역도 청소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집안을 쓸고 닦다가 잠이 들었다. 그러나 새벽부터 집안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아주 커다란 기계음이 삑삑 울렸다. 처음에는 잠결에 들어서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이내 고개를 다시 베개에 묻었다. 그러나 또 잠시 후 큰 삑삑 소리가 들렸다.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몰라 방 안의 가전제품들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가전제품들은 그런 소리를 낼 리 없기에 최근에 샀던 워치에서 소리가 나는 건가 싶어서 들여다봤는데 아무런 알람도 오지 않았고, 배터리도 충분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란 말인가?


범인은 안방 천장에 붙어있는 화재경보기였다. 몇 분 간격으로 짧고 굵게 울리는 걸 봐서는 아무리 봐도 불이 나서 울리는 경보음이 아닌 것 같고, 배터리가 다 될 때가 되어서 큰 알람으로 배터리를 갈아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새벽 6시가 지나고 있는 시점에 그걸 알아챘다.


그렇다면 이 주말 새벽에 어디에서 배터리를 구해다가 어떻게 갈아줘야 하는 건지... 비몽사몽한 가운데 지쳐버린 우리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심지어 남편은 논문 제출이 임박해서 거의 일주일 간 잠을 못 잔 상태였는데 이런 일까지 생기게 되어 인내심이 남아날 리 없었다. 우리 둘은 화낼 기력도 없이 간헐적으로 울려대는 알람을 피해 거실로 나와 멍을 때렸다.


정신을 좀 차리고 아파트 관리사무소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비상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직원은 그 화재경보기에 있는 버튼을 조작해 보라고 제안했다. 직원의 지시대로 화재경보기의 버튼을 누르니 소리가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황급히 다시 몇 번 버튼을 누르니 일단 큰 소리는 잠재워졌지만, 간헐적인 삑삑거림은 계속되었다. 직원은 현장으로 사람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언제 정비사가 올지 모르니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 잠에 들지 못한 채로 거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두 시간쯤 기다리니 드디어 직원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드디어 살았구나. 커다란 사다리를 가지고 온 직원은 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을 우리에게 짧은 안부를 건넸다. 안방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직원은 화재경보기를 고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40여 분이 흐르고 나서야 소리는 그쳤고, 화재경보기도 새 걸로 갈아졌다. 정비를 끝내고 그는 우리에게 이제 낮잠 좀 자라며 인사를 건네고 떠났다.


나중에 엄마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그래도 미국은 미국이라고, 고생은 좀 했지만 화재경보기 같은 중요한 장치에 대한 운영을 잘하고 있는 것 같다는 대답을 해 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내가 한국에 잠시 다녀갔을 때 아파트에 불이 크게 나서 대피를 했던 적이 있다. 그때를 떠올리며 잠시의 번거로움을 통해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면 몇 번이고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