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안에 동생들에 대한 증오심이 자리잡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빠의 좋은 모습만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아빠의 차별을 겪었고 아빠에게 매질도 당했고 아빠가 무서웠던 적도 있으며 아빠가 얼른 죽어버리길 바랐던 사춘기시절도 있습니다.
중학교2학년 때였는데 부반장 성은이가 나를 조용히 교실 뒤쪽으로 불렀습니다. 너의 목 뒤에 있는 멍자국을 봤다면서 아빠에게 맞은 거냐고 묻더군요. 나는 그 멍자국이 별로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그런 작은 폭력은 흔했었거든요. 그래서 왜 맞았는지 어떻게 멍이 들었는지도 기억이 안 났던 자국이었는데 부반장 성은이는 그 멍자국에 엄청스레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습니다.
내가 오히려 안심을 시켜줘야 했습니다. 괜찮다고요. 견딜만한 멍이었고 그런 건 일상이었으니까요. 비교적 다른 폭력가정에 비해 폭력의 수위는 낮았다고 자위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매일 있었던 건 아니고 술 취한 아빠눈에 띄지만 않으면 되었거든요.
그랬는데 참 신기하게도 살면서 그런 폭력의 멍자국들이 다 옅어졌습니다. 나는 바보는 아닌데 진짜 이상하게도 그런 아빠를 미워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아빠에게 측은지심을 느꼈고 나의 아빠라고 애틋해졌으며 지금 돌아가신 상황에서는 아빠가 웃던 장면만 도돌이표로 떠오릅니다. 나는 나의 이런 긍정회로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동생들도 특별히 증오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막내여동생만은 그냥 거론조차 안 하고 삽니다. 나를 제외시키려 애썼던 친척들, 그러니까 작은 아빠 두 분과 고모내외분에게도 이젠 앙심이라던지 미움이라던지 원망이라던지 그런 감정이 없습니다. 때때로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들은 할머니와 지냈던 삶의 단편의 기록들인데 그 기록들이 나를 살려내곤 합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다시 보고 싶은 건 아닙니다.
나는 요즘 수시로 증발해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곤 하였습니다. 먼지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또 마음에 기쁨이 샘물처럼 샘솟곤 하는 삶의 이중성이 손바닥 뒤집듯 그런 소멸의 의지를 꺾어버리곤 합니다. 언젠가 한 번은 동생들에게 고소당하고 아빠를 영영 볼 수 없게 되고 할머니도 볼 수 없었던 그런 장면들을 아무 감정 없이 슬픔 없이 기록해보고 싶었는데 이번 연재를 통해 잘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참 뜻밖에도 이 글을 연재하면서 할머니와 아빠의 부고소식을 듣고 지금도 여전히 슬픈 상황이지만 이 글을 연재하면서 얻은 힘도 큽니다. 마음이 정리가 되고 있었거든요. 나는 아빠에게 물려받은 좋은 유산이 되어준 정리하는 습성 덕분에 마음도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꽤 잘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잘 성장하였고 잘 늙고 있는 중이라 스스로 평가하며 나를 독려합니다.
요 며칠은 내가 우울증인지를 고민하며 약을 먹어야 하나 싶어서 가족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남편도 딸도 우울증은 아닌 거 같다며 신경정신과 가는 것을 만류하더군요. 그 들은 내가 우울증이었던 때를 알고 있어서 정말로 아픈 모습을 잘 알고 있어서 지금의 그들이 내린 의견도 맞을 겁니다. 우선은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딸의 말도 맞다고 여기고 있어요.
“엄마는 우울증 아니야, 가족의 죽음 앞에서 슬픈 건 당연한 거 아냐? 가족의 슬픔도 이겨내야 할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냥 엄마는 슬픈 거야”
그 말이 너무 좋습니다. 나는 그냥 지금 슬픈 겁니다. 특히나 아빠의 죽음이 슬픈 거랍니다. 아빠의 환한 미소를 기억합니다. 아빠가 우리 집의 식탁에 앉아서 내가 해 준 보리굴비를 맛있게 먹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빠가 막걸리 한 잔에 기분 좋게 취해서 웃던 껄껄웃음을 기억합니다. 아빠가 날 때리던 날의 표정은 기억이 나질 않고 그때의 아빠를 미워하던 모습보다 좋은 모습을 더 많이 떠올리고 있는 나를 내가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억지로 하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좋은 추억만 되새김질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내가 써 온 글들로 인해 나쁜 기억들이 모두 걸러지고 소화되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살리고 있습니다. 이 글이 나를 매일 살려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