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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영 Aug 18. 2024

벽을 뛰어넘는 사람들

타인과 나 사이의 높은 장벽

한 커플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고 여자는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림이지만 실제 배경을 넣어서 다시 설명해 보자. 

사무실로 사용하는 공용 공간의 라운지다. 남자는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고 쭉 뻗은 다리 때문에 옆 테이블에도 앉기가 무안한 상황이었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거나 공공 예절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곧 라운지를 정리해 주시는 사모님이 입장하셨고, 그 광경을 바라보다 커플에게 다가갔다. 

이곳은 개인 공간이 아니라 사무용 공용 공간이기 때문에 예의를 지켜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한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 앉았고 나는 흥미롭게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았다.

(솔직히 사모님께 엄지척을 날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는 없었다)


남자를 벌떡 일어나게 만든 것은 사모님이 입은 유니폼 때문인지 아니면 본인도 무의식 중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미약한 죄책감(?)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 태도를 보면서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몇몇의 공공 예절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대처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들은 원래 나쁘거나 예의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전혀 아니다. 그들은 잠깐 방만했을 뿐이다. 자신이 원래는 올바른 사람이고, 예의를 지키는 교육을 배웠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부드럽게 알려줄 필요가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커플이 한강이든 공원의 벤치든 집에서든 자연스러운 애정 표현을 하며 사랑을 이어나가길 바란다. 


이런 배움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진짜 배우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겪은 일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앉을 좌석을 휴지로 열심히 닦더니 휴지 두 조각을 바닥에 그냥 버렸다. 나는 사모님께 배운 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뭔가 중요한 것이 바닥에 떨어져 있어요 라는 느낌으로 바닥을 가리켰고 그 사람은 놀라서 바닥을 보았다. 지폐라도 몇 장 흘린 줄 아셨던 걸까? 그러다 휴지를 보더니 약간 무심한 듯이 휴지 조각을 주워서는 자신 옆의 빈자리에 던졌다. 


나는 이런 식의 방식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났다. 왜 저렇게 행동하지? 왜 아이를 조용히 시키지 않지? 왜 쓰레기를 버리지? 하지만 그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계속 그런 행동을 할 것이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때로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분위기에 이끌리거나 그날 갑자기 재수가 없던 날인지 원래는 안 하던 행동이 익명성에 기대서인지, 자기도 모르게 나오기도 한다. 타인의 다소 비도덕적인 행동에 대해 채찍질을 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대신 내가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기분이 안 나쁘고 부끄러울 정도로만 짚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면 이거 흘리신 거 아니냐고 누가 물어봐줬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 교정의 기준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법적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그에 따라 과도한 교정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워낙 흉흉한 세상이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과민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해 뭔가 불만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나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세상은 더러운데 나는 깨끗한 경우가 있을 수가 있나? 


반대의 경우도 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 사실 어르신이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 이를 도와주는 젊은 사람들은 나는 꽤 많이 보았다. 교정이 어렵다면 그냥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것이라도. 나는 대학생 때 어떤 할머니가 짐을 옮기다 무거우셨는지 계단에 앉아서 잠깐 앉아계신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친 적이 있다. 근데 별 것도 아닌 그 일이 왜 아직도 생각이 나는 건지. 그 이후로 나는 뭔가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 사람을 볼 때면 (그냥 지나치면서도) 은근한 죄책감을 느꼈다. 


어느 날은 퇴근길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이 만취했는지 지하철 바닥에 쓰러져서 자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이 꽤 많았는데 모두가 들어오면서 그 장면을 보면서도 아무도 그에게 다가가지 않는 장면이 나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다. 초등학생쯤 되는 아이가 지하철에 탔는데 그 아이는 아빠에게 저 아저씨 왜 저러냐고 계속 물어봤지만 아빠는 아이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했고, 그 아이는 아무도 그 아저씨를 없는 사람인 척하는 것이 무척 신기한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어떤 남자는 그 장면을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나는 영상을 촬영하는 사람에게 양심이 어디 있는지 묻고 싶다가도, 아이의 모습에서 모른 척하는 어른 중 하나인 내가 지극히 부끄러웠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남자를 내 아래에 놓고 있었지만 사실 외면하는 것은 영상으로 찍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라는 기준이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십몇 분 남짓을 혼자 고뇌와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결국 나는 내가 내리는 역에서 그 남자에게 다가가 잠깐 정신이라도 들 수 있도록 흔들었다. 그 남자는 일단 눈은 떴지만 솔직히 그 뒤의 일은 잘 모르겠다. 뭔가 그 사람을 흔들어서 깨운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고 그 이상은 도저히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조금 팍팍하게 느껴지는 삶에서 최대한 손해 안 보고 피해 안 보고 살려고 한다. 선의로 접근해도 안 좋은 일을 당하는 사례를 우리는 뉴스를 통해 많이 보았다. 심지어는 아무 생각도 없고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무차별적인 어떤 사건에 휘말려 괴로운 일을 겪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죽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다른 이의 짐을 같이 드는, 버스에서 쓰러지는 여자를 자신의 자리에 앉히는, 어려움에 처한 낯선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이들은 수두룩하다. 그들은 타인과 나의 높디높은 장벽을 필요한 순간에는 거뜬히 넘어간다. 


우리는 언제나 어느 정도까지 해야 맞는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살아간다. 나도 고민이 된다. 하지만 그런 고민이 있는 세상은 앞으로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사진: UnsplashBernard Herm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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