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도 천편일률로 맞춰야 하고, 주말도 반납해야만 하는 직책자의 코스
이제 골프 시작해야지?
5년 전쯤 처음 직책자로 보임되었을 때,
옆 부서 파트장님이 골프책을 선물로 주셨었다.
중고거래를 좋아하지만 책은 웬만하면 버리지 않고 쟁여두는 내 성향에,
그 책이 지금 내 서재에 남아있지 않다는 건 그때도 어지간히 나는 골프가 싫었나 보다.
남들은 '요즘 유행'이라고 안 하던 사람들도 시작한다던 그 골프가 말이다
그리고 몇 년간 회사를 전배 오기도 했고, 유사하게 리더 일을 했지만 직책은 없던 탓에 나름 회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팀장 생활을 시작하고 또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직 골프 안 한다고?
전과 다른 것은, 골프를 치냐는 질문과 권유가 아니라
이제는 거의 의무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왜 모두들 골프에 빠져 있는가?
직책자는 골프를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반대로 직책자가 되기 위해서는 골프를 쳐야 하는 건가?
사실 생각해보면 골프를 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회사에서 말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회의나 모임에서 업무 얘기보다 꼭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골프 이야기라 그렇지.
그렇다면 왜 골프를 싫어하게 되었는가?
첫째, 기본적인 룰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먼 곳에 구멍을 파놓고 공을 여러 번 때려서 넣는 이 스포츠는 점수를 따는 재미도 없고, 긴장감도 느낄 수 없었다. IMF 때 박세리 님의 활약을 알만큼 알 나이에 보고 자란 세대이지만, 그것이 챔피언의 자리를 놓고 싸우는 경기였기에 공감했을 뿐이지, 스포츠 자체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매번 필드를 나가는 것만 같이 많은 사람이 즐긴다고 하지만
심지어 필드에 나가는 건 일부이고, 대부분을 연습장 또는 스크린 골프장에서 보내야 하는 이 스포츠는
그야말로 허세 싸움하기 딱 좋은 스포츠 정도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둘째, 골프의 본질이다.
골프는 영업에 최적화되어있는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골프를 스포츠로 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회사의 팀장/임원 또는 그 이상에서 골프를 치는 이유는 사실 접대와 정치가 이뤄지는 주요 필드라는 점에 있겠다.
( 회원권이 어떤 구조로 짜이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관심도 없지만 )
필드에 한번 데려가 주는 것으로 접대를 대신하는 영업을 많이 보아왔다. 어쨌든 비싼 스포츠는 맞으니까
또한 윗 상사를 모시고 회사에서 못한 얘기나 부탁을 주고받는 것에 많은 시간을 쓰게 된다. 그 이유는 골프라는 스포츠가 실제로 플레이를 하는 시간보다 이동하는 시간이 상당히 많고, 그 안에서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티가 나지 않게 물질적인 비용을 대신 지불할 수 있고, 그 사이에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강제적으로 많이 주어진다면, 그 두 가지가 필요한 사람들에겐 이보다 좋은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셋째. 골프를 치려면 주말을, 내 시간을 바쳐야 한다.
이 점이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주중에 골프를 치러가는 건 휴가를 내지 않는 한 말 그대로 근무태만이다.
모든 스케줄은 주말에 잡힌다. 2000년대 회사들에서 주말에 근무를 하거나, 주말에 회사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을 꼰대들의 말도 안 되는 문화라고 말하는 게 요즘 세대이고, 요즘 트렌드이다. 이 스포츠는 이 트렌드를 완벽하게 역행한다. 온전히 내 시간을 바쳐야 이 모임에 참여할 수 있다.
웬만큼 가까운 골프장을 가는 게 아니라면 하루는 그냥 버려야 한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이 낙이고, 행복인 나에게는 극도의 거부감이 드는 포인트이다.
심지어 진입하기에 돈이 적게 들지도 않고, 기본비용 외에도 교통비, 캐디비 등등하면 상당한 비용이 든다
( '직책자인데 그 정도는? 돈을 더 버니까 그 정도는'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럼 뭐하러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고 일을 하는 건가, 우리는 골프를 치기 위해 돈을 버는 게 아닌데 )
게다가, 골프를 치지는 않지만, 그 과정을 바로 옆에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위에서 말한 것 외에도 많은 이상한 점들이 더 있었다.
홀컵에 공을 넣어야 마감이 되는데, 대충 비슷한 곳에 갖다 놓으면 더 치지 않는다. 시간 때문이라나.
분명 이 스포츠는 시간제한이 아니었는데, 저게 일종의 문화라고 한다.
골프장에는 마치 브랜드가 아니면 옷을 입을 수 없는 것처럼 가지가지 골프 브랜드의 옷과 장비들을 가지고 누가 더 좋은 장비를 가지고 있나 자랑하는 시간들이 있었는데, 아주 오래전 어린아이들이 하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유년시절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 스포츠를 좋아하는 건가.
또한, 이전 회사의 대표님이나, 임원 방에는 항상 골프 채널 티브이가 재생 중이었는데, 주요 보고를 하러 들어갔을 때도 그 화면을 끄지 않았다. 그리곤 거기 나온 얘기들을 필드에 나가서 마치 자기가 한 플레이처럼 자랑하듯 얘기를 했다 ( 참고로 그분들 지금은 모두 집에 가셨다 = 임원 계약이 연장되지 않았다. ).
물론, 이 모든 이유와 경험은 주관적이다.
참고로 나는 보는 스포츠로는 야구를 / 하는 스포츠로는 볼링을 좋아한다.
야구만큼 점수가 다이내믹하게 나는 경기도 아니며, 볼링처럼 동일한 환경에서 하는 게임도 아니다.
( 야구의 매력은 의외성에 있고, 볼링의 매력은 누구나 강자가 될 수 있으며 동일한 환경에서 연습과 실전이 이뤄지고 실력을 겨룰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런 취향을 가진 사람에게 골프란,
직책 자여서 받아들여야 하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할 만큼 재미없는 스포츠이다.
심지어, 부탁/청탁보다는 실력을, 정치보다는 논리로 승부하려는 사람에게 더더욱 그렇다.
현실에서, 상위 직책자로 갈수록 골프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많은 윗선에 위치한 사람들이 골프를 하나의 문화처럼 만들어 놀이터라고 생각하고 다니고 있으니까
하지만 몇 년 뒤면 이마저 바뀌지 않을까.
더 이상 직원에게 술을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워라벨이 중요하니 야근을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수평적 문화가 되면서 직책이라는 것이 없어질 것처럼
( 물론 그래도 윗선은 생길 것이고 골프 치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
나는 그 세상을 위해 버텨보련다. 왜 골프를 치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골프가 싫어요, 정말 싫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한다.
그리고 적어도 나부터 취미를 천편일률적으로 맞추어야 하는 이런 강요는 하지 않겠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일을 하러 만난 것이지,
각자의 삶까지 함께해야 하는 사람들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