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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현 Mar 25. 2020

저 파도였는데...

좋은 파도는 늘 지나고 나야 보였다.

가장 마지막에 본 입사 면접은 2년 전이었다. 당시 나는 조금 더 놀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숫자로 표시되는 내 통장 잔고는 숫자라 해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미래의 나'는 2달 이내로 가족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거나 고리 대출에 손을 대서 빚이 산더미처럼 늘고, 현관에서 신발 벗는 법을 모르는 무서운 아저씨들을 우리 집에서 맞이할 가능성이 있었다. 


가능성 x 끔찍함 = 경고 레벨


낮은 가능성이었지만 끔찍함이 최악에 가까웠으므로 빨간불이 들어왔다. 빨간불은 사람을 일하게 한다. 주섬주섬 쓸만한 것을 주워 모아 정갈해 보이도록 다듬어서 매일 이력서를 하나씩만 깔끔하게 쓰고, 나머지 시간은 조금 더 띵가띵가 놀면서 밤마다 통장 잔고를 보면서, 무서운 아저씨가 오려면 며칠이나 남았는지 가늠했다. 그러던 중에 면접이 잡혔다.



면접은 회사 입장에서 나와 회사가 잘 맞을지 그렇지 않을지 가늠해보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면접자 입장에서도 나와 이 회사가 잘 맞을지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그리고 그건 아주 능력이 출중하고 경력도 충분하고, 지난 시간 혁혁한 공을 세워온 사람의 이야기다. 그게 아니라면 이론상으로만 그런 것 같다. 보통 사람의 스펙은 보통이므로. 그저 내가 얼마나 잘 맞춰줄 수 있는지 뽐내다 볼일 다 보는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보통 사람에겐 벅차다. 


보통 면접을 앞두면 다들 그러한지 모르겠지만, 나는 면접을 앞두고는 밥을 못 먹는다. 평소엔 김치만 있어도 세상 달게 밥을 잘 먹는데, 면접날에는 밥맛이 없다. 말 그대로인 상태가 된다. 뭘 먹어도 아무 맛이 나지 않는다. 입도 말라서 잘 넘어가지도 않는다. 면접 전에는 또 시간이 째깍째깍 가지 않고 막 들쭉날쭉하게 흘러버려서, 순식간에 30분이 지나기도 하고 같은 분침에서 몇 번이나 그대로인 경우도 있어서 불안하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지만 면접에 늦을 것만 같기만 하다. 결국 밥을 거르거나 물에 말아 후루룩 마시고 현관을 나선다.


면접을 다 본 다음 내 소감은 '얼얼함'이었다. 면접관은 대표였다. 그는 내가 아는 가장 인사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면접자를 대할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는 느낌이었고, 그건 내게 익숙지 않았다. 해외여행에 가서 난생처음 호텔에 들어섰을 때 느낌이었다. 이런저런 호의와 친절에 난 어쩔 줄 몰라했다. 대표는 내 이력서를 미리 읽어 온 듯했고, 내가 면접 전에 상품을 주문해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허리도 이용하여 인사를 했고, 회사와 팀원과 회사에서 제공할 수 있는 시설을 구경시켜줬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헤매지 않도록 편리한 교통편과 그곳까지의 길을 알려주었다. 대표는 회사 밖까지 나와 배웅했다. 나는 긴가민가했고, 어색했고, 나한테 왜 이러나 싶었고, 스스로 방금 왔던 길이면 보통 돌아가는 길도 비슷하지 않나 싶었고, 대표는 면접 때마다 저러나, 아니면 면접이 처음인가 싶었다. 그래서 좀 얼얼했다. 내 손엔 그 회사에서 팔고 있는 상품의 샘플이 쥐어있었다. 젤리가 종류별로 가득했다. 무슨 간식이 가장 좋냐기에 젤리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그 파도는 좋아 보였다. 이 파도라면 최고의 서핑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최선의 서핑을 했다.


파도와 함께 한 동안은 즐거웠다. 정말 맘껏 뛰어놀았고 매출은 거의 수직 상승했다. 이력서에 적을만한 일들이 수시로 쌓였고, 회사는 다수의 투자를 받았다. 사람 간 스트레스는 0에 가까웠으며, 마지막은 역대 최악이었다. 하지만 끝이 너무나도 좋지 않은 게 흠이었다. 나는 많이 억울했고, 이해되지 않았다. 왜 저러나 싶고, 왜 저렇게 하나 싶었다.


크게 낙담한 채로 바다에 와서 다시 라인업에 앉아 파도를 봤다. 좋은 파도, 나쁜 파도 그리고 잘 모르겠는 파도가 있었다. 이제는 좋아 보이는 파도도 자신있게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지나고 나서야지만 좋은 파도인지 나쁜 파도인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파도였는데... 탈걸...'

그런 마음만 자꾸 들었다.

포항 영일만 3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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