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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현 May 20. 2020

시작하는 여름의 맛, 포도

옆에서 포도 농사를 지으시는 할아버지는 늘 천천히 걸어 다니시면서 친근하게 말을 붙이신다. 샤인 머스캣이랑 알이 작고 씨가 없는 포도를 지으시는데, 지난 몇 년간 샤인 머스캣 값이 좋아서 그런지 표정이 늘 밝으시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고, 혼자서 하기 어렵다기보다는 정말 어린아이의 손이라도 잠시만 있으면 훨씬 편할 것 같은 일들이 있는데 그럴 때 아무렇지 않게 잠시 잡아주신다거나 해서 감사할 때가 많다. 그렇지만 조금 난처할 때도 있다. 포도 할아버지 농장에는 차가 2대가량 들어갈 정도의 주차 공간만 있는데 지금처럼 포도에 손이 많이 갈 때나, 손님 올 경우에는 따로 주차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우리 농장에 차를 대놓는다. 사실 이래저래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상황이 보여서 여기에 주차를 하지 말라고 말하긴 좀 그랬다. 아직 소가 들어오지도 않아서 가끔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것 외에는 괜찮았다.


어쩌면 포도 농장 할아버지는 나름 그게 미안하고 또 고맙기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바로 수확한 포도 몇 송이를 맛보라고 주셨다. 과일을 워낙 좋아하고 포도는 특히 좋아해서 거의 모든 품종을 알지만 생전 처음 보는 포도였다. 알이 무척 작고 씨가 없지만 당도는 샤인 머스캣만큼이나 좋다고 했다. 예전에 그리스 신화를 다루는 만화를 봤을 때, 거기선 포도를 한알씩 안 먹고 입에 넣고 오물오물하면 포도 줄기만 쏙 나오는 게 내가 여태껏 봤던 포도와는 너무나 달라서 신기했는데, 후에는 그냥 묘사겠거니 했는데 이 포도가 그런 종류의 포도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 샤워하는 동안 냉장실에 잠시 보관해뒀다가 깨끗이 씻은 포도는 정말 재밌는 맛이었다. 맛은 칠레산 레드글로브나 요즘 나오는 가지 포도랑 비슷했는데 식감은 아삭하기보다는 물방울 터지듯 톡 하고 입에서 터졌고, 수확한 지 오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꽃향기가 무척 선명한 포도였다. 그 포도를 하나씩 따서 입에 넣으니까 이제 여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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