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을 기억하게 하는 맛
2018년 2월 - 하루 한 잔, 바닐라 라떼
늘 먹던 걸로.
요새 작업실에서 소소한 허세를 부리고 있다. 매번 같은 음료를 마셨더니, 이젠 다들 알아서 따뜻한 바닐라 라떼를 만들어준다.
커피 샷을 뽑아, 바닐라 시럽을 두어 번 펌핑, 그 위에 살짝 거품 낸 스팀 우유를 붓는다. 만들어지는 과정을 맞은편에서 조용히 보고 있으면, 직원 분이 부드럽게 손끝을 움직이며 우유 거품으로 뭔가 만들어 낸다. 마무리된 모양은 하트, 나뭇잎, 삼엽충(?) 등 각각 다양하다. 라떼 아트를 전문적으로 하는 곳은 아니지만, 이곳만의 재미가 있다.
한 번은 일 때문에 평일 일찍부터 나와 자료를 찾고 있었다. 작품 전체 일정이 앞당겨져 대본 마감도 빠듯해진 상황. 밤새 작품 속에 들어갈 고생대 고사리, 암모나이트 화석 따위의 사진 자료와 그네들을 담백하게 묘사할 단어들로 씨름하다 왔는데, 그날따라 여기서 늘 먹던 바닐라라떼 위에 삼엽충을 그려주는 게 아닌가. 당시 내 작업 상황을 모르니 의도한 건 아니었을 터. 들어보니, 하트를 만들어 보려 했다가 망해서 이게 나왔다고. 며칠 째 피곤에 절어 있었는데, 웃음이 빵-터졌다. 덕분에 그 날 열심히 작업할 수 있었다.
씁쓸한 연애가 끝났을 때.
괜히 기분이 울적해져서 집을 나섰다. 혼자 있기 싫은데, 그렇다고 혼자 있다는 걸 티내고 싶지도 않은 그런 날이었다. 책이나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작업실에 나왔다. 무슨 책을 볼까, 마음도 꿀쩍한데 스산하고 잔인한 스티븐킹 단편선이나 읽어볼까. 그러다가 괜히 더 우울해지는 건 아닐까.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잡념들을 휘저으며, 담담히 바닐라라떼를 받아 라이브러리로 갔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꽃 사들고 가서 머리통을 망치로 내려치는 내용을 읽다가,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밝고 명랑한 소설을 봐야 했나 보다. 가뜩이나 우울한데 심란해졌다. 날이 추워서 그날따라 라이브러리에 사람도 없었다. 홀로 멍하니 있다가, 테이블 위에 둔 커피를 두 손으로 그러쥐었다. 손 전체에 퍼지는 온기. 조심히 플라스틱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 하트가 겹겹이 그려져 있었다. 만들고 있을 땐, 내 마음이 복잡해 보지 못했던 모양이 담겨 있었다.
때때로 맛과 향은 어떤 특정 장소에서의 모습들을 떠오르게 한다. 삼엽충라떼라며 함께 깔깔대던. 울적한 얼굴에 작은 위로를 담아주던. 그 때 그 곳에서의 기억들. 맛은 부드럽고 달콤하다. 향도 마찬가지. 하루 한 잔, 바닐라라떼를 마시며 점점 이곳에서의 시간을 쌓아간다.
[출처] [월간 안전가옥 2월] 하루 한 잔, 바닐라 라떼 by 김민혜|작성자 안전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