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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생이 Mar 05. 2020

선생님 유치하게 왜 이러세요

"연습할 때마다 여기에 색칠하세요"





이번 주도 구구절절합니다

왜 연습을 안 오는지 묻는 선생님께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안 온 게 아니라 못 온 거라며, 요즘 일이 바빠도 너무 바쁘다며 핑계를 댑니다. 선생님이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작은 한숨을 내쉽니다. 살짝 눈치를 봅니다. 이번 주는 꼭 연습을 오겠다며 공수표를 날립니다. 그제야 오늘의 레슨이 시작됩니다.




피아노를 배우고 있습니다.

작년 퇴사 여유가 생기자,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피아노 배우기'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악보 위에 그려진 음표를 소리로 바꾸는 일. 그 자체로도 즐거웠습니다. 흥미를 느끼다 보니 자주 치게 되고, 꾸준히 치다 보니 실력도 늘었습니다. 그래 봐야 기초 수준의 곡들이지만, 오른손으로 멜로디를, 왼손으로 반주를 동시에 쳐낸다는 것이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진 못했습니다.


문제는 실력에 정체기가 찾아왔을 때부터였습니다. 레슨을 받으며 진도는 나가고 있었지만, 실력은 제자리인 기분이 들었습니다. 예전처럼 연습을 해도 예전처럼 늘지가 않았습니다. 답답했습니다. 덩달아 흥미도 사그라들기 시작했습니다. 연주가 막힐 때마다 짜증이 나고, 연습이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학원을 찾는 빈도가 슬슬 줄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론 '본업이 바빠서'라고 말하지만, 스스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피아노가 하나의 스트레스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선생님이 무언가를 들고 왔습니다

평소라면 "연습하고 가세요!"라는 말과 함께 레슨이 끝났을 텐데, 오늘은 선생님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연습 체크표였습니다. 초딩시절 피아노 학원을 다닐 때 쓰던 기억이 납니다. 연습한 횟수만큼 빈 동그라미를 색연필로 메꾸며 연습량을 확인하는 종이.


손에 받아 들고 보니, 체크표에는 이미 이번 주 해야 할 연습량이 적혀있었습니다. '내가 나이가 몇 갠데 이런 걸...'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 잘 되라고 하는 거지'하며 팔랑팔랑 종이를 들고 연습실로 들어갔습니다.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악보를 펼치고 그 옆에 체크표를 뒀습니다. 그 자체로도 뭔가 기분이 달랐습니다. 그전엔 대충 몇 번 뚱땅대다 가야겠다는 마인드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빈 동그라미를 모두 채워버리겠다는 다짐. 막연히 잘 칠 때까지가 아닌, 구체적인 연습 횟수, 새로운 동기가 생긴 것입니다. 바로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건반과 색연필을 번갈아 누르고 집어가며 그 자리에서 이번 주 연습량의 반을 채워버렸습니다. 파란색 색연필로 야무지게 채워진 동그라미를 보니 성취감이 몰려왔습니다.


막히는 부분을 만났을 때도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쉽게 포기하던 전과 달리 꾸역꾸역 쳐나갔습니다. 체크표의 동그라미를 칠해야 하니까. 그렇게 연습 횟수가 늘어가고, 덩달아 막히는 부분도 자연스럽게 해소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유치하게 왜 이러세요?

잠시나마 이런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을 반성합니다. 유치해 보이는 초딩용 연습 체크표가 이리 유익한 기능을 할 줄 몰랐습니다. 특히 저같이 의지박약인 사람에게 이런 극약처방이 없습니다. '잘 칠 때까지'라는 막연한 목표가 '동그라미를 다 채울 때까지'라는 구체적인 목표로 바뀌니,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갯속을 걷다 길을 발견한 기분이 듭니다.


체크표의 횟수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치다 보면, 빈 동그라미가 채워집니다. 동그라미를 다 채울 때가 되면, 쩔쩔매던 곡도 그럭저럭 연주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늘어가는 실력이 동기부여가 됐다면, 지금부터는 빈 동그라미가 새로운 동력이 될 것 같습니다.


조금 유치하지만 참 유익한 장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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