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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생이 Sep 08. 2022

쿠쿠에서 햇반으로 (하)

즉석밥을 샀다. 매일 먹는 밥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아서


난 내 시간이 늘어날 줄 알았다. 독립을 하면 그럴 줄 알았다. 부모님의 터치로부터 자유로워지니까.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정확히 그 반대였다. 집안일 또한 부모님의 터치에서 자유로워졌기에. 가족끼리 나눠서 하던 빨래, 설거지, 분리수거 등의 일이 고스란히 내 할 일이 됐다. 그렇게 내 작고 소중한 자유시간은 독립 전보다 더 줄고 말았다.


특히 끼니를 챙기는 일은 시간을 뺏는 1등 공신이었다. 밥 짓고, 상 차리고, 상 치우고, 설거지까지 끝내고 시계를 보면 1시간쯤은 우습게 지나갔다. 냉동실에 소분한 밥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마저도 떨어진 날엔 또 쌀을 씻고, 밥을 안쳐야 했다.




여느 날처럼 야근 후 집에 돌아와 쌀을 씻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얼마나 맛있는 밥을 먹겠다고, 이렇게 공을 들여 쌀을 씻고 있는가?, 햇반 하나면 쌀을 씻을 필요도, 밥통을 닦을 필요도, 취사를 이렇게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는데.’라는 생각을.


그리고 그것은 생각으로 그치지 않았다. 일단 밥을 안치고 쿠팡을 열었다. 쿠팡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추천상품에 다양한 즉석밥들을 보여줬다. 가격과 후기를 비교하고 괜찮은 제품을 골랐다. 주문하기 버튼을 누르기 전, 군말 없이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밥솥이 눈에 들어왔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미안함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니까. 나는 즉석으로 주문 버튼을 눌렀다.




즉석밥은 신세계였다. 그동안 밥을 짓기 위해 했던 모든 과정이 단 2분이면 끝났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위해 이 문명의 혜택을 포기하며 살고 있었던 것인가. 밥맛도 직접 지어먹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라고 합리화 중이다.) 확 줄어든 식사 준비시간 덕분에, 퇴근 후 나는 좀 더 오래 침대와 한 몸이 될 수 있었으며, 좀 더 길게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볼 수 있었고, 냉동고 속 냉동밥이 사라진 자리에 아이스크림을 좀 더 채워 넣을 수도 있었다. 즉석밥 하나로 삶의 질은 올라갔고, 밥솥을 쓰고 싶다는 욕구는 떨어졌다. 덕분에 쿠쿠는 싱크대 위에서 수납장 안으로 자리가 밀려났다.


어느덧 자취 1년 차를 바라보는 지금. 여전히 나는 즉석밥을 찾는다. 그래도 가끔씩 직접 해 먹는 밥이 생각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잠들어 있던 쿠쿠를 다시 깨우지…. 는 않고, 본가에 가서 밥을 얻어먹는다. 그곳엔 엄빠가 해주시는 더 맛있는 밥과 푸짐한 반찬이 있으니까. 게다가 부모님의 얼굴도 볼 수도 있고.


그렇게 나의 쿠쿠는 역사박물관에 놓인 하나의 빗살무늬토기처럼, 한 때는 나도 직접 밥을 해 먹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유물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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