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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입가경 Apr 13. 2020

이름 없는 카페

やりとり-paniyolo

https://youtu.be/W0lNB724MA4

*오늘의 글과 어울리는 곡은 'やりとり-paniyolo'입니다. 

(컴퓨터, 아이패드, Youtube Premium 환경에서는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09.01(토)


매달 1일은 뭔가를 시작하기에 깔끔한 날이다. 그래서 사놓고 뜯지 않던 128기가짜리 메모리카드를 뜯고 카메라를 챙겼다. 내가 눈으로 본 것보다 카메라로 본 게 더 많았다. 많이 찍고 녹화하다 우연히 이런 카페에 들렀다. 2명 이하의 손님만 입장이 가능하며, 허락 없는 사진 촬영은 금하는 카페. 간판도 없이 안내글과 카메라 금지 스티커만 붙어 있는 대문을 지나니 책을 읽는 손님 한 분과 눈인사로 우리를 맞이하는 사장님 한 분이 있었다. 대화 소리가 곧 소음이 되는 곳에서 해야 할 말들을 고르는 동안 교토의 하이파이 카페를 떠올렸다. 커피를 호로록거리는 소리만 겨우 냈던 카페, 엄숙한 침묵 속에서 왠지 자꾸 웃음이 나와 코를 막았던 기억이 났다. 우리는 표정으로 대화하거나 필담을 나누면서 음악소리와 경쟁하듯 목소리를 높이던 카페에서 가져온 피로를 덜어냈었다.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렇게도 우연히 다시 그 경험을 하게 되다니.

조용한 카페에서는 새로운 감각을 쓴다. 카운터에 쌓인 책 이름을 읽으려고 굳이 초점을 맞춰보거나 창밖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다. 괜히 커피의 첫맛과 끝 맛을 분석해 보기도 한다. 조용한 도서관을 영 못 견디는 나인데 카페의 침묵은 어째서 견딜 수 있을까. 아마 여기저기 보면서 멍하니 있어도 되기 때문일까? 생각들을 덧붙이다가 또 나무의 움직임에 시선을 뺏긴다.

“큰 창이 중요한 게 아니구나. 창문으로 나무가 흔들리는 걸 볼 수 있어야 돼.” 친구가 끄덕인다. 아주 작은 창을 내더라도 그 사이로 빛이 뜨고 지고, 가끔 흔들리는 나뭇잎을 실컷 구경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관찰하는 일은 무딘 감각들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또 작은 것들을 보고 드문드문 나누는 대화들은 마음을 배부르게 한다.

어렸을 적에 꿈꾸던 집을 떠올려보면, 만화책을 실컷 쌓아놓고 읽을 수 있는 다락방을 소원했다거나(지붕이 열려서 밤에는 별을 볼 수 있어야 했다) 개인 운동방을 만들고 싶어 했다거나(언제든 노래를 틀고 안무 연습을 할 수 있도록 한쪽 벽면 전체가 거울로 되어 있는), 대형 스크린과 편한 소파로 꾸며진 작은 영화방을 꿈꾸기도 했다. 그때 그려놓은 집들은 모두 케이크 단면처럼 잘린 구조로 기본 3층 이상이었다. 드래곤볼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캡슐형도 있었지, 동그란 창문에. 이제는 집을 노멀하게 평면도로 그린다. (이거 왠지 씁쓸한 기분인데)

이제는 작지만 확실한 기쁨을 찾는 요령을 찾았다고 해 두는 게 좋겠다. 오늘처럼 무조건 큰 창이 있는 집을 바라던 것에서, 아무런 크기의 창이라도 밖으로 식물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집이면 좋겠다, 깨닫는 것처럼. 최근 정리한 집에 관한 생각들은 꽤나 사소하지만 구체적이다. 시행착오를 거듭 겪어서 그런가. 이를테면,


- 매일 쓰는 식기류는 귀여운 것으로 

- 서랍은  안쪽에 레일이 달린 것으로 
- 시선이 닿는 곳에 수와 생화,  두기
- 가구 톤을 맞추기보다 소재를 통일하자.
- 화장실은 건식으로 (이상한 고집)

- 암막커튼보다는 원목 블라인드
- 침대 프레임은 비싸고 좋은 것으로 (매트리스도 역시)

- 소파는 푹신푹신하면서도 밝은 색을 

- TV 대신  벽에 빔을 쏘자 (TV 보는 과정을 최대한 번거롭게 설계하기)
- 작업공간을 제외한 곳들의 메인 조명 색은 주백색이 좋겠다.
- 화려함이나 세련됨보다는 단정함, 그리고 따뜻함을 품은 분위기로 가꾸기

- 방울토마토, 바질, 로즈마리를 키우자

- 원두 볶는 냄새를 풍기는 로스터리 카페가 집 근처에 있기를
- 창문 밖으로 식물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집이기를 (New!)


과 같은 것이다.

적어놓은 것들을 보자니 왜인지 부자가 된 기분이 든다. 행복을 잘게 쪼개어 맛보기 한 기분이다. 모든 면에서 과식하지 않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조용한 카페라는 게 이렇다. 사람을 명상하게 한다. 프리랜서 전향 후 낮에 돌아다닐 수 있게 되어 기쁜 이유는 인적이 드문 시간에 마음껏 걷고, 조용한 카페에 진득하게 앉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다. 저녁이 있는 삶도 아니고 낮이 있는 삶의 매력을 알아버리다니, 큰일이다. 시간이 지나 이 거짓말 같은 여유를 그리워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마음껏 즐길 수밖에.



망원동 '이름 없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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