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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입가경 Apr 09. 2020

파도가 들린다

Acaso(with Ivan Lins)-나희경

https://youtu.be/HChPryZj3W8

*오늘의 글과 들으면 좋을 노래는 'Acaso(with Ivan Lins)-나희경'입니다. (뮤직비디오가 정말 예뻐요!)

(컴퓨터, 아이패드, Youtube Premium 환경에서는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슬슬 마감을 미루기 시작한 지금의 나에게

2년 전의 내가 보낸 글


11.29(목)


  동안은 목요일만 되면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수요일에는 목요일엔 글을 써야지 다짐했다가도 당일이 되면 이상하게 자꾸 몰입의 시간을 피하게 됐다.  이유는 없었다.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시간을  손안에 쥐었다고 해서   마음대로   있는 것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에 잠겼다.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은 시간에는 어김없이 무기력한 마음들이  안으로 들었다.  기분을 지우기 위해 당장 문을 열고 나가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가만히 앉거나 누워서 가라앉은 것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편이었다.

최근에는 매일두유(매일  시간씩 어떤 일에 몰입하는 습관을 유지하는 ) 덕분에 무기력의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었던  같다. 하루를 좋은 에너지로 채우는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개인적인 성취로 가득 채웠던 날들이었다. 그런데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다시 외주 작업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쏟게 되면서 작은 균열이 생겼다. 매일두유를 지나친 날들이 늘었고, 스스로 단단해질 시간을 무시한  나흘째인 오늘 다시 무기력에 잠겼다. 오전에 간단한 메일링 잔업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그레이 아나토미를 틀어놓고 졸았다.  먹을 새도 없이 하루가 금방 갔다.  J 만날 시간이었다. 드라이 맡겼던 터틀넥 스웨터를 올해 처음으로 꺼내 입었다. 좋아하는 코트를 입고 나와 뺨에  공기를 스치며 걸었다. 정신이 조금 들었다. 밖에 나오니 좋구나, 생각했다. 고작 반나절 잠겨있었을 뿐인데  출소한 죄수처럼 바깥공기가 반가웠다.

J 만나 오늘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하루 종일 누워서 그레이 아나토미만  얘기를 가만히 듣던 J 잘했다는 말을  주었다. 그리고  시간들을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이라 했다. 최근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기 시작한 J 그런 시간들이 쌓인 덕분에 글감들이 마르지 않는  같다고 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쓰임이  시간을 보낸 것이니 속상해하지 말라고도 했다. 괜찮은 위로였다.   오랜만에 목요일의 글쓰기를 하기 위해 블로그를 켰고, 이제야  밖으로 건져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를 적시는 무력감의 형태를 가늠할  있었다.


그것은 깊은 바다에 잠기는 모양이라기보다 파도치는 해변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제 자리에 서 있고, 파도가 왔다 가는 것이다. 언제든 혼자 힘으로 걸어서 나오면 되니 동요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집으로 돌아와서 책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을 마저 읽는데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여기서는 불안을 파도에 비유한다. 그리고 몰아치는 파도를 이기려면 노력하는 모습을 유지하라고 말한다. 책의 띠지에 적힌 말처럼 창의성을 발휘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에는 지난한 노력의 시간이 필요하다. 성장하고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는 불확실성, 평가 대상이 되지 못하는 과정을 견뎌야 한다.





30p :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간을 들이고 집중력을 잃지 않는 것이다. 결과가 바로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노력을 멈춘다면 그들이 느끼는 불안함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인지 지망생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불안함의 큰 축은 나태한 자신이었다. 성과를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만큼, 본인이 그나마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자신의 노력하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태식 :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한테 강요하지 않잖아요. 나태해지는 내 상태에 대한 불안이 제일 커요. 그런 제 모습에 대한 경멸감이 있어요. ‘아, 내가 왜 이렇게 못하지?’ 하는 능력에 대한 괴로움보다는 하기 싫어질 때, 안 하고 있을 때처럼 나태해지는 순간이 더 힘들어요. 사소하게는, 밤새 시나리오 쓰고 낮잠 잤는데 너무 많이 잤을 때 있잖아요. 그렇게 일어났을 때 드는 어떤 느낌.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지만 자꾸 까먹는 것 하나, 다시 손에 쥐게 된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눈을 뜨자마자 출근 대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되는 이 날들을 무력감으로 채우고 싶지 않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글을 쓰고 책을 몇 자라도 더 읽어 본다. 천천히 파도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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