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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입가경 Mar 05. 2020

애정하는 치읓에 대하여

Let's get lost - Chet baker

https://youtu.be/sIoquPMcG_E

*오늘의 글과 함께 들으면 좋을 음악은 ‘Let's get lost - Chet baker’입니다.

(컴퓨터/아이패드 환경에서는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고작 두어 시간을 머물 카페를 월세방 고르듯 보는 습관이 있다. 커피의 맛을 떠나 공간의 대화 소리가 너무 울리지는 않는지, 테이블 간의 간격이 너무 가깝지는 않은지, 소파의 패브릭 관리가 잘 되었는지, 내부의 공기가 쾌적한지. 이따금 밖을 구경할 수 있는 창문이 있는지. 때에 따라 선순위가 바뀌긴 하지만 대체로 이 중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발견하면 다시 가지 않았다.


딱 보면 척, 축적된 데이터로 설정된 카페 찾기 시스템. 지난겨울 이 기능의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버렸던 사람이 하나 있다. 때는 2015년 12월, 비엔나커피라는 신문물에 취해있을 무렵이었다. 합정과 상수 사이, 손잡이 없는 큰 나무문을 밀고 들어간 카페 <시간의 공기>에서 처음 들어본 목소리. “같이 길을 잃자, 서로 품에 안겨서 길을 잃자.”


어머, 청각을 시작으로 점점 모든 감각이 녹는 중이었던 내가 카운터에 서서 뱉은 첫마디는 “비엔나 한 잔이랑요”가 아니라 “이 노래 뭐예요?”였다. 그게 쳇 베이커와의 만남이었다. 홀린 듯 자리에 앉아 그의 트랙이 이어서 재생되는 동안 대부분의 노래를 플레이리스트로 옮겨 담았다. 그날, 처음으로 재즈는 어렵다는 개인적인 편견이 누그러졌다. 여러 뾰족한 잣대들을 무마하는 음악의 부드러운 힘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재즈를 어렵다고 느꼈던 이유 세 가지는 리듬을 타기 어렵기 때문에, 외워서 따라 부를 수가 없기 때문에, 들으면서 묘하게 긴장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쳇 베이커의 노래들은 그 이유를 모두 뒤집는 전혀 새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그걸 사람들은 쿨 재즈라 말했다.


(막간 재즈 tmi :

그동안 재즈 보통의 모습이라 오해하고 있었던 ‘악기들끼리 막 다투는 것 같고, 음악이 언제 끝날지 몰라 손에 땀을 쥐게 되는’ 곡들은 재즈 중에서도 프리재즈라는 카테고리에 속한 친구들이었고, 브라스가 경쾌하게 뿌뿌 거리며 빠른 박자로 달리는 곡들은 대개 비밥과 스윙이라 불리는 친구들이었다)


쳇 베이커의 목소리는 부드럽다. 세상에 닳고 닳은 담담한 목소리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애정 어린 속삭임이 들린다. 트럼펫 연주도 화려한 것 없이 뭉툭하지만 섬세하고 유려하다. 그렇게 몇 달을 제목도 다 못 외우는 그의 앨범들을 반복 재생하며 보냈다. 좋아하는 톤이 생기고, 비슷한 아티스트를 찾아 듣다 보니 모르고 지나쳤던 재즈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쿨 재즈 장르를 틀어놓는 카페가 생각보다 정말 많다)


쳇 베이커가 듣는 귀를 열어준 셈이다.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간질거리는 보사노바라든지 웨스 몽고메리의 동글동글한 기타 소리를 알아채는 레이더가 생긴 이후로 유수의 힙합 트랙이나 가요에서도 재즈 베이스의 쓰임을 발견하며 반가워했다.


음악 취향을 이야기할 때, 손쉽게 장르의 특징을 빌려 말할 때가 있었다. ‘R&B 힙합이 좋아.’, ‘요즘은 시티팝 장르도 좋던데’ 하고. 그러다 쳇 베이커 이후의 순간부터는 장르보다 가수의 이름을 말하게 됐다. 내 취향의 시작점은 장르가 아니라 우연히 만난 어느 아티스트의 노래 한 곡이었기 때문이다. 브라운 아이즈와 유재하, 김현철, 스티비 원더, 브라이언 맥나잇, 크러쉬, 백예린, 마마스 건과 에밀리 킹을 지나 쳇 베이커,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웨스 몽고메리, 쟈니 스미스와 죠지까지. 장르는 다르지만 이들은 공통분모 하나로 묶인다. 매력적이거나 따뜻한 음색이라는 것, 연주하는 것이 악기이든 목소리든 말이다.


생각해보면 좋아하는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줄줄이 이어졌다. 비엔나커피를 찾아 간 카페에서 만난 쳇 베이커, 쳇 베이커를 듣다 발견한 쿨 재즈, 관련 재생목록에서 찾은 웨스 몽고메리와 2년 넘게 듣고 있는 재즈 기타 수업. 애정하는 마음 하나가 여러 갈래로 쉬지 않고 가지를 뻗는다. 이렇게 에세이의 끝 문장에 닿을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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