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가난해질 때가 있다. 마음이 충만해서 넘쳐흐르는 순간이 있는 것과 반대로 아무리 쥐어짜내려고 해도 텅 비어서 그런 상태가 몇 날 며칠을 가게 되는 때가. 그런 날들은 며칠이고 일상에서 사소한 일로도 찔끔 흐르는 눈물을 머금고 있다가 저녁이 되면 꺼이꺼이 울게 된다.
이렇게 가난해진 마음에 영양을 공급해주기로 한다. 마음의 양식이란 무얼까.
다른 사람의 관심이나 인정은 달콤한 초콜릿 같다. 너무 유혹적이지만 중독되기도 쉬운 타인의 시선들. 다행히 나는 달콤한 걸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편인 것 같다. 누군가의 인정과 관심에 과하게 취하기 전에, 내가 구축해놓은 나의 안전 구역으로 돌아오는 일은, 이제 그렇게 어렵지 않다.
역시, 내가 제일 힘든 사람은 누구보다 '나 자신'이다. 나를 괴롭히는 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있다기보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달렸다. 내가 나를 아주 잘했다 인정하는 순간의 나는 뿌듯함을 느끼지만, 어떨 때는 못나고 바보같은 나인 것을, 그럴 때의 나를 참 많이 미워하고 있었다. 부단히 자기객관화를 읊조리거늘, 내 안의 완벽주의와 능력주의는 매번 스스로를 괴롭힌다. 능력을 인정받고 성과가 나고 사람들과의 만남마저도 좋았다면 그렇게 비대해진 능력있는 한 쪽의 내가 약하고 쓸모없고 비루한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과하게 부풀어진 행복함에 붕 떠있다가 한순간 조각 하나가 빠져버리면, 젠가처럼 이 공허한 행복은 아주 쉽게 무너져 불행과 불안의 형태로 뒤바뀐다.
그렇게 노력하면서도 텅 비어버린 마음의 가난함이 안쓰러워서 나는 그렇게 꺼이꺼이 우나보다.
예전에는 술을 마시면서 나 자신을 내려놓곤 했던 것 같다. 술이 마음을 유하게 풀어주고 완벽주의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줘서. 그런데 이 술이 꼭 내성이 생긴 약같이 변해버려서 대체로 나는 완벽주의의 나로 그대로 있다가 술이 과해지고 감정이 격해지면 어느 한 순간 숨어있던 비루한 내가 튀어나온다. 그럴 때는 언제나 최악이 되고야 만다.
애인에게 묻기도 한다. 가끔은 얼마나 나를 좋아하냐고 묻기도 하지만, 가끔은 이래도 날 좋아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예전에는 내가 상처받지 않는 것에 급급해서 상대를 고려하거나 배려하지 않고 상대에게 이런 질문을 과하게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권여선 소설에서, 무심한 젊은 시절을 가진 중년의 여성처럼 그런 날들을 회상해보곤 한다.
당시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물, 과장된 연기만 하도록 태엽 감긴 무無였다. (...)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 권여선, <기억의 왈츠>
사랑이 무어냐고 실체가 있는 거냐고 최근까지도 나는 반문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하다. 왜 이때까지 몰랐을까. 내가 가지지 않았거나 반쪽짜리로만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몰랐던 것이다. 이때까지 사랑이란 건 (내가 나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좋은 것'을 찾고 발견하는 일이라 여겼는데, 사실은 (나와 상대의 좋은 점과 비루한 점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괜찮다 여기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새로운 사랑이 실패할까봐 두렵고, 우정이 금이 갈까 전전긍긍하며, 오래도록 들어주지 않고 외면했던 약한 소리를 실컷 늘어놓아본다. 오랫동안 미움을 키워왔던 다른 이에 대해서도 마음을 스르륵 풀어해쳐, 이제 그만 되었다, 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확신에 차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기로 한다. 나에게 무해한 사람이고 싶다던 말을, 며칠간 잘 씻지도 못하고 고생할 여행길을 선뜻 나서면서 나에게 실망할 일이 없을 거라고 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나도 그렇게 마음껏 사랑해보기로 한다. 불안해할 때 손을 잡아주고, 뚝딱거리는 걸 귀여워하고, 허세부릴 때 웃으면서, 그냥 그렇게.
불안이 조금씩 걷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