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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SIDE Feb 21. 2017

150일짜리 쉼표,

혈색 좋은 백수, 근황기.

벌써 2월도 끝나간다. 1주일만 지나면 무직자로 지낸 지 150일이 되는 날을 맞이한다.

이로서 내 세상의 시간은 지구 상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가설은 정설임이 밝혀졌다. 150일이라니...


자, 내 계획은 이러했다.


우선 두 달 정도는 지난 5년의 보상이라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푹 쉬어볼 것이다. 따뜻한 남쪽 바닷가 동네로 내려왔으니 원 없이 서핑을 좀 해야겠다. 그 와중에 푸르른 바다가 보이는 작은 바닷가 카페에 앉아있으면 막 영감을 받겠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새로운 사업계획을 세우는 거야! 푹 쉬는 동안 충전한 에너지를 발톱부터 끌어모아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거지. 그리고 냉철함과 감수성을 겸비한 프로페셔널 도시남 코스프레로 하루를 보내며 가볍게 버번위스키 언더락 한 잔으로 잠을 청할 것이다.


계획상으로는 멋지게 바쁜 남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어야 할 타이밍인데... 

오늘 아침도 한적한 싸구려 커피숍에서 타이핑으로 자기 위안 중이다. 다행스럽게 사는 곳이 바다 마을이라 경치는 기가 막히다.


할 일 없는 백수로 지내다 보니 역사 속 철학자들은 백수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것 같다. 지난 5개월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깊은 고민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사람이 한 달 내내 같은 생각만 하면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좀 놀랍기도 했다. 이왕 논거 마음 편하게 쿨 내 진동하며 놀았노라 기록하고 싶지만, 사실 그러하지 못했다. 


자, 5개월간 내 의식의 흐름은 이러했다.


우선 두 달 정도는 파도가 없는 날도 꾸역꾸역 바다로 나가 서핑을 즐겼다. 태양 빛과 물결이 만들어내는 패턴 위에 떠있는 것만으로도 영락없이 좋았다. 허나 그 즐거움도 곧 익숙해졌다. 술자리를 빌어 밤빌리지 폐업을 상기하며 땅 주들에 대한 분노와 과거 밤빌리지의 영광을 교대로 소환하며 취했다. 드라마틱하게 등장해 줄 것 같았던 멋진 아이디어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제법 시간이 흘러갔고, 제야의 종소리는 울렸고, 나는 떡국을 먹었다. 젠장할 나이만 또 한 계단 성장했다. 노화되는 뇌도 말썽인데 조급증까지 생겨 그런지 매모패드 위로 던지는 아이디어들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 답답하구먼. 술이나 한잔 해야지, 젠장 취업이나 할까? 아냐, 정신 차리고 퐈이팅해야지. 시작해 볼까? ~ 아, 답답하구먼. 술이나 한잔 해야지, 젠장 취업이나 할까? 아냐, 정신 차리고 퐈이팅해야지. 진짜로 시작해 볼까? ~ 아, 답답하구먼. 술이나 한잔 해야지, 젠장 취업이나 할까? 아냐, 정신 차리고 퐈이팅해야지..... 달력 한 장 찍-.


그렇다. 쿨 내 라고는 전혀 맡을 수가 없다. 혹자들처럼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도 다녀왔으면 깨달음 드립이라도 끄적일 텐데... 


지금껏 고해성사를 정리하면, 나의 근황은 백수들의 전통적 과업인 사업구상 중이다. 더불어 갈아엎기를 반복하고 있다. 더, 더불어 심리학자가 TV에 나와 뱉어 놓은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라는 멘트를 부여잡고 위안 삼고 있다.


나이도 제법 먹었고, 5년 전 제법 거창한 도전으로 창업도 해봤고, 산전수전 분야에선 명함 정도 내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쯤 되면 자기계발서나, 위너들의 인터뷰, 자서전에서 본 것처럼 폼나고 당당하게 새로운 시작을 대면하지 않을까 하는 성급한 생각도 했었다. 안타깝게도 아직 그 정도 깜냥이 못된다.


시작은 항상 불확실성 투성이고, 용기보다는 겁이 우세했었다. 

시작은 항상 초라하고 피폐했었다.

하지만...

관성의 법칙처럼 가장 큰 힘을 들여 움직이기 시작하면 머지않아 조금은 수월해지리라 믿는다.

 

쉼표를 찍고, 150일이라는 긴 띄어쓰기 후에 타이핑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쯤에서 생각의 마침표를 찍고, 일출과 함께 새로 열린 오늘에 집중해야 할 것 같다. 글을 맺으려니 갑자기 뭔가 거창해졌다. 그렇다, 글이든 영화든 어쭙잖은 것들의 마무리는 대충 거창한 것 같다. 


혹,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이가 있다면,

궁금하지도 않을 근황이랍시고 뜬금없이 싸지른 영양가 없는 글 똥을 보며 낭비한 시간에 심심한 사과와 감사를 함께 전한다.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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