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욕심마저 내려놓게 한 아름다운 시골길 <대구–부산>
간만에 아름다운 드라이브를 만끽하고 청도를 가기 위해 풍각에서 내렸다. 이름도 느낌도 생경스러운 풍각 터미널은 첫인상이 매끈하고 단출하다. 특히나 반짝거리는 대합실 바닥이 낯설게 느껴진다. 터미널 대합실엔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 몇 분이 나와 계신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어디를 가시는 분들 같지가 않다. 알고 보니 청도나 경산을 가는 친구 분을 배웅하러 나오신 분이 더 많다. 이쯤이면 거의 마을회관이다.
터미널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풍각천이 흐른다. 이 하천은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미군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마령재를 넘어온 40만의 피란민들이 움막을 짓고 피난살이를 했던 곳이다. 그때 유명해진 곳이 바로 풍각장이고, 더불어 유명해진 노래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도 등장했던 1953년 발표된 박향림의 ‘오빠는 풍각쟁이야’라는 노래다. 풍각쟁이는 시장이나 남의 집 문전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돈을 구걸하는 사람을 말한다. 피난민들이 즐비했던 풍각 장터에 풍각쟁이의 출현은 아마도 흔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당시 풍각쟁이들이 문전 구걸로 받은 몇 푼을 가장 알차게 쓰는 방법은 당연히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었다. 그 전설의 풍각장 국밥집이 아직 현존해 있다. 이름하여 ‘이름 없는 소머리국밥집’이다. 사람들은 60년 노포인 이 집을 소 껍데기 국밥집으로 불러왔다. 저렴하면서도 시원한 국물이 있고 푸짐한 소머리 수육이 가득 들어있으니 어느 풍각쟁이가 좋아하지 않았을 것인가.
맛을 보니 전형적인 장터국밥 그대로의 맛이다. 지금은 시장 곰탕이라는 조그만 상호가 달려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름 없는 국밥집이라 부른다. 소머리국밥을 하게 된 이유는 지리적인 연유가 있다. 풍각장은 과거 우시장을 거느린 청도의 유명한 장터였는데 장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마령재를 넘어와 풍각장을 찾아왔다. 거기에 피란민들이 더해져 더욱 유명세를 떨쳤다. 그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우시장 근처에서 소머리국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과 피란길, 문전 구걸과 트로트에 소머리국밥까지 더해진 동네가 바로 풍각이다. 우리에게 청도는 소싸움과 청도반시로 더 알려져 있지만 이 조그만 땅 위에 반세기가 훌쩍 넘는 슬픔과 고통, 희망과 기대가 마구 교차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게 쉽게 믿기지 않았다. 이제 칭다오 맥주가 아니라 청도반시가 자랑스럽게 버스에 걸려있는 청도 행 버스에 오른다. 가는 곳마다 다홍빛 감나무가 아름다운 도시 청도는 또 어떻게 나를 반겨줄 것인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