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미(Mommy, 2014)
모성애. 세 글자에 마음에 뭔가 탁 걸린다. 숭고하지만 불편한 이 단어. 통념적으로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한다. 역사책의 책장을 꽤 많이 넘겨서 남은 페이지가 얇아질 때쯤이면 우리는 이 단어가 ‘엄마’를 불편하게 만들어왔음을 안다. 그만큼 ‘신화적’ 모성애의 해체를 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생명의 탄생 공간으로 상징되곤 하는 자궁에 대해 ‘모래 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로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최승자, 「즐거운 일기」, 1984)고 그 생명성을 헛헛하게 말한다. 악마 같은 자식을 낳아 놓고 그에 대해 진정한 모성은 생득적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드는 영화(<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린 램지)도 등장했다. 게다가 자기 아들의 살인마저도 덮어버리는 국민 엄마에게서 볼 수 있던 신화적인 모성의 뒤틀린 괴이함까지(<마더(Mother, 2009)>, 봉준호). 절대적인 사랑이라고 믿었던 모성에 대한 회의감이 퍼져있다. <마미(Mommy, 2014, 자비에 돌란)의 초반에는 스티브가 불을 질러서 이를 소화하느라 물이 찰박거리는 곳에 스티브의 엄마 디안이 청바지 끝머리를 닿을 듯이 불편하게 걸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아들로 인해 불편하게 살았을 그녀의 지난 날과 현재의 질척거림을 보여주듯이. 그리고 방화사건으로 인해 스티브를 넘겨주며 여자 관리자는 디안에게 단언한다. “사랑과 구원은 별개에요.” 그녀도 누군가의 어머니일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디안 역시 단언한다. “나는 그런 비관적인 생각을 믿지 않아요.”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스티브에게 붙여진 라벨이다. 흔히 장애라 불리는 것을 안고 있는 자녀의 어머니는 강하다. 후덕한 몸매, 억척스러운 성격, 까칠하고 걸걸한 입담. 마치 아버지의 견고함을 갑옷처럼 입고 있는 여성의 모습을 하고서 아들에게 울타리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마미>의 디안은 어떤가. 스티브를 수용소에서 넘겨받는 자리에서 자신의 싸인에 하트를 그린다든가 직업을 잃고 아들 앞에서도 엉엉 울어버린다. 짧은 치마에 진한 화장을 즐겨하고 술과 담배를 달고 사는 10대 비행 청소년 같다. 그렇다고 돈이 많은 집안의 공주도 아니다. 학력이 짧은 그녀는 단순 번역직이나 가정부의 일을 한다. 스티브를 돌보기엔 어딘가 부족한 모체의 모습이다. 이 부족함을 채워 주는 일은 아비가 아닌 옆집 여자 카일라다. 그녀는 전직 교사로 스티브를 돌봐주고 가르쳐주는 양육의 역할을 도맡는다. 스티브가 자해하고 쓰러 졌을 때 그를 들쳐 업고 가는 양 쪽의 여자들은 인상적이다. 그녀는 모자라지만 혈연에 의하지 않고, 성 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스티브를 키운다.
그렇다면 이 두 여자 사이에서 자라는 스티브는 어떤가. 유아기적 행동을 일삼는 사고뭉치로 보인다. 슈퍼에서 물건을 카트 째로 담아와 훔쳐오는가 하면 감정 기복에 따라 디안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다. 게다가 자해 행위까지 하는 불안한 작태까지. 하지만 이 행동을 조금 더 넓게 보면 어떨까. 스케이트보드 위에서 1:1비율의 좁은 화면을 스티브가 열듯이 조금 더 지평을 열어보면 어떨까. 스티브의 감정은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사랑이다. 그동안 답답하다고 여겨왔던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과 외양은 다르지만 속은 같다. 직장을 구하는 데에 좌절하는 엄마를 위해 슈퍼에서 물건을 훔쳐오고-반짝거리는 금색의 'Mommy' 글자의 목걸이가 대변해주듯- 엄마가 받아들여주지 않는 자신의 사랑을 끊임없이 투사한다.“언젠가 엄마도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될 거야.”라고 응석부리는 꼬마아이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자신은 엄마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절절한 일편단심의 반증이다. 이 날 것의 사랑에 카일라도 녹아들어 말을 더듬는 장애를 극복한다. 셋은 하나처럼 밥을 먹고 노래를 부르며 여유를 즐긴다. 그러나 행복은 역시 잠시. 스티브의 방화사건은 부메랑으로 돌아와 빚더미가 된다. 디안은 스티브에게 최악인 감옥행을 면하기 위해 차악인 감시 수용소에 다시 넣는 것을 택한다. 카일라는 “나는 가족을 버릴 수 없다”는, ‘너처럼’이 생략된 비수 같은 말을 디안에게 던지고 떠난다. 스티브는 수용소에, 카일라는 원래의 집으로, 디안은 또 다시 혼자 집에 남아 셋은 흩어진다.
결국 사랑과 구원은 별개일까. 디안은 스티브를 수용소에 넣은 자신의 결정을 ‘버림’이라는 단어로 축소한 카일라에게 말한다.“삶은 순간의 선택일 뿐이야. 난 당시에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후회 없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카일라가 등지고 떠난 후에 디안은 현실의 어쩔 수 없음을 온몸으로 고통스러워하듯 몸서리친다. 디안과 스티브의 사랑방식은 현실의 규격화된 정사각형 프레임에 갇히기엔 너무나 자유로왔기에.
돌란은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시 자신에 대해 천재라고 호평한 제인 캠피온에 대한 헌사로 “16세 때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를 처음 보았다. 그 영화는 나로 하여금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쓰고 싶게 만들었다. 영혼, 희망, 강인함을 간직한 여자들. 희생자도 아니고, 객체도 아닌 여자들에 대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사랑에 관해 가장 자신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소재는 다름 아닌 어머니라고 말한다. 이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연출로 그는 스티브의 행동에 음악을 덧붙인다. 아들 스티브가 ‘Colorblind’한 세상에 디안의 ‘Wonderwall’-구원-이 되어주길 바라면서. 마지막 스티브의 뜀박질 후에 이어지는 ‘Born to Die’가 알려주듯, 이 영화는 ‘Mommy’라고 부르지만 ‘객체가 아닌’한 인간으로서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 고백이다. 모성에 대한 아들의 단순한 효심으로 치부될 수 없는 사랑 그 원형의 모습이다. 후반부에 스티브가 디안에게 키스하려하는 행위가 마치 남녀의 사랑처럼 보여 불편하게 보였을 수도 있지만, 스티브에게 당시 키스의 의미는 '엄마'가 아닌 '디안'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Die(극 중 디안의 풀네임은 '디안 다이 데프레')를 위해 태어난, 다이를 향해 태어난, 스티브. 스티브로 대변되는 인간 내부의 날 것의 사랑, 자유로운 사랑의 시작은 스티브를 비롯한 모든 인간에게 '엄마'이다. 어차피 사랑이란 불안하고 어린 누군가가 역시 불안하고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누군가를 포옹하는 경험이다. 옹알이하듯 엄마를 부르는 ‘Mommy’는 그 사랑의 태초의 발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