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Interstella, 2014)
‘머피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1949년 미국 공군에서 인간이 중력에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을 할 때 자신의 실험도구가 빈번히 작동하지 않는 것을 본 ‘머피’라는 엔지니어가 “어떤 일을 하는 데에 둘 이상의 방법이 있고 그것들 중 하나가 나쁜 결과를 불러온다면 누군가가 꼭 그 방법을 사용한다.”는 법칙을 추출해낸 데서 유래했다. 운명론적 법칙을 만든 이 엔지니어의 말을 다른 엔지니어는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며 필연적인 법칙으로 재해석한다. 그 다른 엔지니어는 딸 ‘머피’와 함께 지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력의 힘을 거슬러 우주로 떠나 살 곳을 찾는다. <인터스텔라>의 주인공 ‘쿠퍼’의 이야기이다.
<인터스텔라>의 근미래에 중력을 구심점으로 돌아가는 지구는 자연재해로 디스토피아로 변해가고 있다. 흙은 더 이상 식량을 제공하지 못하는 불모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고 거대한 황사가 수시로 불어 사람들에게 폐병을 일으킨다. 또 다른 행성에서 찾은 자연도 마찬가지다. 지구의 1시간이 7년인 다른 행성의 물은 산만한 파도로 덮쳐와 인간의 목숨을 위협한다. 간신히 찾은 행성을 뒤덮고 있는 얼음은 생명이 거주할 수 없는 곳으로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인간의 추악한 이기적 본성만을 일깨워 주는 존재일 뿐이다. 지구를 비롯한 중력을 가진 행성들의 자연은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해악만을 준다. 그래서 ‘쿠퍼’와 NASA는 중력을 떠나 별과 별 사이의 우주의 웜홀을 찾아 지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한다. 우주의 시공간은 지구와 달리 상대적이다. 물리적인 힘을 받지 않아 지상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무한한 가능성의 시공간이다. NASA는 우주의 ‘그들’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의 블랙홀 내의 5차원의 공간에서 ‘그들’은 ‘우리’였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들’로서 지구에 위험 신호를 보냈고 스스로를 의지적으로 구원한다.
이 설정은 마치 신대륙을 개척한 미국의 역사의 비유처럼 보인다. <인터스텔라>의 근 미래에서 달 착륙의 사실은 허구였음으로 밝혀지고 러시아는 헛군데에 돈을 써서 결국 우주로 가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을 발견한 역사의 기록처럼 미국의 NASA가 우주에 신세계를 개척한다. 결국 인류 구원의 근본적 해결은 러시아가 아닌 미국에서 나온다. 흔한 미국의 영웅물이 그렇듯 <인터스텔라>도 미국우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보인다. 게다가 과학 이론이라는 합리적인 지성에 근거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가족애에서 나아간 인류애라는 감성으로 마무리되는, 사회계약설로 국가를 성립했지만 국가의 유지는 인류애적 감정이 있어야 가능한것과 같은 논리의 인간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영화의 결말은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of the people”이라는 문구로 유명한 링컨의 인간중심주의의 연설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방점은 오히려 여기에 있다. 어설픈 미국주의가 아닌 인류의 사랑에 대한 믿음에 있다. ‘쿠퍼’가 지구를 떠나기 전 ‘머피’와 동시간으로 맞춘 시계는 우주와 지구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여 5차원의 우주에서 ‘쿠퍼’가 보낸 메시지를 3차원의 지구에서 ‘머피’가 받아 ‘유레카’를 외치게 한다. 그리고 ‘머피’는 영화의 제목처럼 ‘별과 별 사이’인 토성의 콜로니에 쿠퍼 스테이션을 세워 인류가 재앙의 지구를 떠나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한다. 가족애가 공동체적 인류애까지 달성하게 된다. 이처럼 people(사람들)이 the people(국민)이 되는 ‘the’는 한 개인의 공동체의식에서 온다. 결국 중력을 견디지 못하는 머피의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머피’라는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