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니스 엔드(Journey's End, 2017)
평소에 전쟁영화를 선뜻 골라서 보지는 않게 된다. <덩케르크>의 경우,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저명한 감독과 아이맥스의 시각적 체험, 새로운 영화적 기법 등이 궁금하여 관람했으나, 다른 전쟁 영화의 경우 특이점이 없으면 잘 보지 않아 왔다. <저니스 엔드>도 마케팅 상으로는 다른 전쟁영화와 크게 다른 점은 없어 보여서 큰 기대 없이 관람을 시작했다. 영화가 끝나고서는,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묵직한 영화적 경험을 하고 나올 수 있었다.
1918년 3월 18일. 프랑스 북부 생캉탱 최전선에서는 영국군과 독일군이 서로 500m 남짓한 공간을 사이에 두고 참호전(대치하는 군대들이 땅을 파서 구축한 반영구적인 참호망에 의지하여 공격·반격·수비하는 전투행위. 출처 다음백과)을 벌이게 된다. 500m를 전력질주 하면 적군의 진영으로 바로 침입할 수 있는 거리다. 그만큼 큰 규모의 포격은 없는 지루한 대치 상황이 이어지지만, 간간이 이어지는 사격과 언제든지 쳐들어올지 모르는 긴장감이 군인들을 압박한다. 한 달에 6일씩 병력이 돌아가면서 배치되는데, 이번 차례는 스탠호프(배우 샘 클라플린)가 지휘하는 C 중대가 들어가게 된다. 이곳에 롤리(배우 에이사 버터필드) 소위가 스탠호프 대위와 같은 곳으로 배정받기 위해, 가족의 지위를 이용하여 신입으로 들어온다. 전쟁 최전선에 친분이 있는 친구를 만나러 들어올 만큼 롤리는 호전적이고 순수한, 8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갓 들어온 학사 장교 출신의 소위이다. 그가 오랜만에 마주한 스탠호프 대위는 예전과 같은 모습이 아니다. 그는 술에 찌들어있고, 거친 모습으로 롤리를 마주한다. 오스본(배우 폴 베타니) 중위는 그런 스탠호프의 술주정을 받아주고, 다른 대원들에게도 다정하게 격려하는 따뜻한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다.
롤리는 전쟁 상황을 신기한 체험 정도로 여긴다. 6일만 잘 버티고 나가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스탠호프는 그간 장기간의 전투를 통해 생지옥을 경험했기에, 그런 롤리가 마뜩잖다. 사실 롤리는 자신의 정혼자의 동생이기에, 자신이 전쟁으로 인해 난폭하게 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나, 자원해서 자신의 부대로 들어온 것이 신경 쓰이고 자괴감이 들기도 할 터였다. 그러던 무렵, 독일군 포로를 생포하라는 위에서의 명령이 떨어지고, 롤리와 오스본 포함 10명의 대원이 독일군의 기지로 들어가게 된다. 롤리는 긴장감에 구토할 만큼 힘들어하지만 결국 독일군을 생포하는 데 성공한다. 이 생포 작전에서 오스본이 죽고, 스탠호프는 그나마 참고 있던 무기력함과 공포에 짓눌려 롤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퍼붓는다. 롤리는 이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독일군을 생포했으나 그 공적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에 대한 서운함? 그런 것은 이제 롤리에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오스본을 상실한 것에 대한 슬픔, 그리고 한때 고향에서 누나와 함께 셋이 뛰놀던 그때의 스탠호프가 아니라는 생각에 질린 표정이 될 뿐이다.
이처럼, 이 영화는 전쟁을 통해 평소라면 보기 힘든 극한 상황에서의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스탠호프는 전쟁으로 망가진, 한때 순수했던 인물을 대표하는 캐릭터로서, 술에 찌들어 공포를 겨우 억누르면서 자신과 똑같이 공포에 떠는 부하 대원에게 총구를 겨누며 윽박지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는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단시간에 보여주며,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극단적으로 만드는지 보여준다. 오스본 중위는 가장 다정한 인물로, 전쟁에서 보기 드문 인간형이지만 결국 전쟁으로 인해 희생당하는 첫 인물이 됨으로써 전쟁의 비극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롤리는 전쟁을 통해 순수하고 활기 넘쳤던 소년의 얼굴에서 겁에 질린 한 인간으로 변하고, 결국 죽음의 얼굴로 이 영화의 비극성의 절정을 찍는다. 세 주연을 필두로 보여지는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은 그들의 호연을 통해 더욱 호소력 짙게 다가온다. 희곡 원작을 두어서인지, 대사와 상황, 연기가 주는 몰입도가 높고, 갈수록 긴장감 있게 완급조절이 되는 플롯이 탁월하다.
그뿐만 아니라, 최전방에서의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연출이 묵직함을 더해준다. 시체와 진흙으로 뒤덮인 최전방의 투박함, 춥고 좁은 막사 내의 침실, 가시거리에 독일군과 마주 보고 있는 긴장된 환경, 움직일 때마다 총소리가 빗발치는 일촉즉발의 상황. 전쟁영화라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설정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서스펜스를 고조시킨다. 그들이 먹는 열악한 음식과 차 만이 이 전쟁 상황에서 긴장을 풀게 해주는 요소이지만, 그마저도 당시의 힘겨운 상황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에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된다.
이후 영화는 목요일에 일어나는 대공습을 통해 전멸하게 되면서 막을 내린다. <덩케르크>가 광활한 공간에서의 전쟁 상황을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면서 전쟁 공간을 체험하게 했다면, <저니스 엔드>는 좁은 공간의 숨 막히는 공간을 통해 긴장감을 체험하게 한다. 또한, 자극적인 전시, 폭력적인 전쟁의 살육, 대규모의 전투 씬이 없어도 충분히 전쟁의 실감과 공포를 전달한다. 가시거리 내에서 전멸한 군사들의 시체를 멀리서 보여주는 이 영화의 엔딩은, 이권 다툼으로 인해 무자비하게 사살당한 인간들의 비참함을 강조하는 효과로 이어진다. 현재에도 1차 세계대전의 한 공간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것이 여전히 유의미한 이유를 충분히 납득시킨다.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일시 : 2018년 11월 20일 화요일 20시
장소 : CGV 용산아이파크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