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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는 이유

나를 각오하게 하는 단단함

라미 사파리 만년필

by 줄타기인생

바우하우스 정신에 매혹된 사람이 어디 나뿐일까. 20세기의 대량생산을 고려한 디자인이고, 양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노력하는 정신. 지극히 정치적이고 또 사회적이다. 현실과 괴리되지 않고 시대를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바우하우스를 사랑하는 것일테다. 또, 그래서 내가 라미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일까.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쓰면서 라미를 빼놓을 수는 없다. 찾아보니 라미도 역시나,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은 제품이라고 한다.


만년필 답지 않은 현대적인 직선 디자인도 너무 좋지만, 어떻게 해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도 라미의 매력 포인트이다. 뚜껑을 단단히 닫아도,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도, 망치로 두들겨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다.


사람의 손 감각이란 의외로 매우 예민해서, 라미를 손에 쥐어봤을때 이 모든 단단함을 직감할 수 있다. 더 좋은 만년필들이 훨씬 많겠지만, 라미가 주는 이 단단함은 아마 라미만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게 라미란 일 잘하는 사람의 상징이다. 필수법칙은 아니지만 일 배우느라 바뻤던 첫 직장 시절, 동경하는 선배들은 다 하나씩 라미를 가지고 있었다. 라미로 수많은 메모를 했다. 투두리스트, 아이디어, 급한 요청, 상사 욕까지. 메모장에도 쓰고 다이어리에도 쓰고 프린트물에도 썼다.


나는 그 모습이 그냥 너무 멋있어서 결국 라미를 샀다. 나도 라미로 메모를 하면 저렇게 멋있는 노동자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이 파란색 라미를 가지고 많은 걸 해왔고 많은 걸 적었다.


내가 그 선배들만큼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만년필을 왜 그리 썼는지 알겠다. 메모장과 라미를 손에 쥐면 뭔가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힘이 솟는다.


컨디션이 안좋아도, 일이 복잡해도, 어려운 강의를 들을 때도 라미로 사각사각 이말 저말을 적다보면 일을 계속 해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그것은 결국 이 만년필이 가진 단단함 때문일 것이다. 라미 같은 단단함을 갖추고 싶다. 계속 배우고 노력하고 쓰고 되새기면 그리 될 것이다. 라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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