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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Aug 17. 2024

사이먼 스톤 연출 <벚꽃동산>

사이먼 스톤 연출. 전도연 박해수 주연 벚꽃동산 마지막 회차 관람. 몇달 전 명동예술극장에서 <벚꽃동산>을 재밌게 봐서 현대 서울 버젼으로 각색한 이 연출본도 궁금했다. 배우들의 연기와 인상적인 몇가지 연출이 좋았고. 각색 과정에서 바뀐 부분에 대해서 든 몇가지 생각들. 


이 희곡은 제정 러시아 말기에 몰락귀족 가문이 겪는 어려움을 다룬 작품이다. 몰락귀족이 가지고 있는 벚꽃동산 별장을 어떻게 처분하는가가 극의 주된 이야기. 그러다 보니 원작에서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익숙치 않은 귀족가문 vs 부동산을 처분하라는 신흥 자본가계급의 구도에서 전자가 이야기하는 벚꽃동산의 향수나 지켜야 할 전통 같은 것들이 나름 설득력있게 제시된다. 애시당초 두 계급의 논리가 다르기 때문. 


물론 극의 전반적 기조는 이 계급의 무능함과 안이함을 비웃는 분위기가 강하나. 그 중간중간 그들이 딛고 서있는 나름의 맥락이란 게 사람을 좀 애잔하게 만드는 맛이 있다. 


이번 연출본은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하다보니 증조부때부터 흥했지만 몰락해가는 재벌가 vs 그 재벌가 운전기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자수성가한 신흥 재벌의 구도로 짜여 있다. 그래서 일단 두 진영이 딛고 서 있는 배경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걸 외면하기 힘들다. 몰락귀족과 몰락재벌은 같을 수가 없거든. 


무엇보다 한국인으로서 몰락가문이 왕년에 증조부때부터 잘사셨다 뭐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니 그럼 너네 친일부역에 군부독재 부역까지?” 라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고. 그래서 극 중 주인공 가문이 ‘전통’이나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말하는 게 진짜 우스꽝스러운 포인트가 된다. 예를 들면 트위터에서 시종시녀들이 ‘역시 잘사는 집 사람들이 기품이 있어’라고 말하는 걸 보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 


아니 니네 같이 돈미새가 어딨다고 전통 따위를…이병철이랑 이건희가 사다모은 한국 미술 같은 건가? 4대째에 이은 세습이 무능의 극을 달려 기업이 줄도산 하게 된 상황을 보면서도 실소가 나오고. 마지막에 벚꽃동산을 헐고 호텔을 짓는다고 하니 주인공 가문이 ‘여긴 우리 기억이 있는 곳이야’라는 절규에 상대가 ’저 어릴때 집은 이미 철거당했습니다‘라고 하는 게 백미.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이 극은 사실 돈미새의 나라인 한국에 전통이나 지켜야 할 게 뭐가 있냐고 비웃는 작품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과거의 귀족을 현대의 재벌로 치환할 수밖에 없지만 원작에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애잔함은 1도 찾아볼 수 없는 땅. 


가진자들이 있어보이는 척 흉내를 내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정당성도 전통도 없다. 마치 태반이 썩어버린지도 모르고 이쁘다 이쁘다 했던 벚꽃나무와 같이. 그래서 원작과는 또 다른 희극적 면모들이 많다. 사실 체호프 사후 벚꽃동산이 상연됐을때도 이런 기분 아니었을까? 아이고 귀족놈들 니네가 무슨 그 썩을놈의 전통이 어쩌고 저쩌고…농노착취로 금수저 물고 산 주제에. 하면서. 그렇게 보니 그 당시의 감각을 나름 재연한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출연진 중에서는 박해수 배우의 존재감이 엄청났다. 나는 이럴때 ‘연기 서커스’라는 말을 하는데. 그야말로 혼자 서커스를 해내고 있는 듯한 느낌. 다시 개막할 가능성이 매우 적은 버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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