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트렌드 컨퍼런스에서 반복해 강조됐던 이야기. 소비재 시장은 줄어들고 경험재 시장이 성장하면서, 브랜드들이 '제품을 파는 브랜드'에서 '특별한 순간을 함께하는 브랜드'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는 새로운 통찰은 아니었지만, 구체적인 사례들과 명확한 프레임워크 덕분에 그날따라 특별히 와닿았다. 특히 내가 자주 생각하는 '할 일 이론'과의 연관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할 일 이론은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이 주창한 제품 기획론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이 특정 상황에서 문제를 느끼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품을 '고용'한다는 것이다. 할 일을 맡겨야 해서 제품을 구매한다. 그래서 할일 이론이다.
이 이론의 대표적인 예시로 드는 것이 밀크셰이크 딜레마라는 에피소드이다. 같은 밀크셰이크지만 시간대별로 고객도, 문제상황도 다르다. 출근길에 밀크셰이크를 마시는 사람은 간편하게 아침 허기를 달래려는 목적이지만, 저녁에 가족과 함께 밀크셰이크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자상한 부모로서의 역할 수행이 포함되어 있다.
또 다른 예시는, SSAS 쪽에서 자주 저지르는 실수인데, 고객이 진짜 필요한 기능이나 연출을 놓치고 지나치게 고기능성을 추구하다가 외면받는 경우다. 이러한 상황과 해결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제품의 스펙만 높이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개선하다가 실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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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론은 물론 완벽하지 않고, 허점도 많다. 그러나 나는 제품 기획과 마케팅에 있어 매우 유용한 프레임워크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담당했던 브랜드들을 돌아보면, 성공한 제품들은 항상 명확한 문제 해결 상황이 존재했다. 어떤 면에서 이런 제품은 마케팅이 정말 용이하다. 그 상황만 잘 보여주면 되니까. 그럼 공감과 자극을 바탕으로 전환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제 브랜드가 '특별한 순간을 함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할 일 이론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해지는 지점이 생긴다. 물론 고객의 욕구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직접적으로 해결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이지만, 미묘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일까.
'특별한 순간' 프레임워크는 자금력과 브랜드 영향력이 있는 대형 브랜드에 더 적합해 보인다. 특별한 순간은 단순히 제품에 반영하는 것을 넘어, 브랜드가 직접 경험을 창출하고 투자해야 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팝업스토어 같은 것들부터 대규모로 이뤄지는 브랜드향 여행패키지 같은 것들...반면 스몰브랜드는 오히려 이런 트렌드에 덜 민감한 면이 있다.
할 일 이론이 제품 중심적이라면, '특별한 순간' 프레임워크는 브랜드 경험에 초점을 맞춘다고 봐야겠다. 제품 관점에서 브랜드를 생각한다면 특별한 순간에 함께하겠다는 목표는 1:1 효율로 측정하기 어렵다. 그저 이런 순간에 써보라고 제안을 주는 것이 최대치이다. 그러나 소비자가 실제로 우리가 의도한 상황에서 제품을 사용할지는 항상 불확실하다.
다만 이런 시도들이 하나둘 성공하면서 쌓이다 보면, 브랜드만의 고유한 무드와 특별한 순간들이 만들어지는 거 같다. 이런 이유로 '특별한 순간을 함께하는 브랜드'라는 개념은 개별 제품의 성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브랜드에게는 아직 시기상조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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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퍼런스를 들으면서 성공하는 제품과 브랜드의 본질적 조건은, 표현만 조금씩 달라질 뿐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할 일 이론을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정리해보면 결국 시간의 문제인가 싶기도 하고. 할 일 이론에 기반한 제품 기획과 마케팅이 꾸준히 쌓여가면서, 그 과정에서 반복되는 일관된 제품 '고용' 상황들이 브랜드만의 고유한 무드와 특별한 순간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는 왜 너무 다양한 방향의 제품을 내놓는 브랜드들이 결국 뚜렷한 무드 형성에 실패하는지도 설명해준다. 비록 '특별한 순간'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이 대형 브랜드에 더 적합해 보일지라도, 제품이 어떤 순간에 사용될지 가정하고 설계하는 것, 더 나아가 그러한 순간을 새롭게 발명해내는 것은 앞으로도 성공적인 제품 기획의 핵심 요소로 남을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물론 뇌피셜이고, 실제의 성공적 제품 기획은 저런 엄밀한 이론 하에서 돌아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나중에 정리해보니 그렇다는 거지 뭐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