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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언덕 Feb 17. 2021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

<논어><위정>맹의자문효자왈무위 <심청전>

개별 맞춤식 孝효 특강 <논어><위정> 5-8장


5장

孟懿子 問孝 子曰 無違 (맹의자 문효 자왈 무위)

맹의자가 효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김이 없어야 한다."


樊遲御 子告之曰 孟孫 問孝於我 我對曰 無違 (번지어 자고지왈 맹손 문효어아 아대왈 무위)

번지가 수레를 모는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맹손씨가 내게 효에 대해 묻길래 내가 '어김이 없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樊遲曰 何謂也 子曰 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祭之以禮 (번지왈 하위야 자왈 생사지이례 사장지이례 제지이례)

번지가 "무슨 말씀이십니까?"하고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살아계실 때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로써 장사지내고 예로써 제사지내는 것이다."


6장

孟無伯 問孝 子曰 父母 唯其疾之憂 (맹무백 문효 자왈 부모 유기질지우)

맹무백이 효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는 오로지 자식이 병들까 근심한다."


7장

子游 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자유 문효 자왈 금지효자 시위능양 지어견마 개능유양 불경 하이별호)

자유가 효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금은 효라는 것을 봉양 잘하는 것이라 하던데, 개와 말을 키우는 것도 잘 먹이는 것이니,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 둘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8장

子夏 問孝 子曰 色難 有事 弟子 服其勞 有酒食 先生饌 曾是以爲孝乎 (자하 문효 자왈 색난 유사 제자 복기노 유주식 선생찬 증시이위효호)

자하가 효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제자가 부모의 수고를 대신하고 식사를 먼저 드리는 것이 일찍이 효라고 하겠는가?"



<논어>의 <爲政위정>편은 정치에 대해 논하고 있는 부분인데, 德治덕치 외에도 생애 주기별 학습관과 효도의 방법까지 논하고 있다.


政정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곱씹어 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政정은 바를 正정과 글월 文문이 합쳐진 자이다. 단순히 '나라를 다스리는 일'인 줄 알았더니, 그 외에 법, 가르침, 다스리는 이의 자세, 바로 잡다 등 '바르게 펴는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바르게 펴는 것'이라는 면모에서 '孝효'까지 이야기되는 듯하다. 유교의 기본은 가정 내에서의 부모와 자식의 마음가짐이 임금과 신하의 마음가짐으로 연결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다. 孝효가 무엇인지 묻는 여러 제자들에게 공자가 내리는 지침이 각기 다르다.


공자는 孟懿子맹의자에게는 無違무위, 어김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혹시 맹의자가 잘못 알아들었을까봐, 樊遲번지를 통해 넌지시 다시 설명해 준다. 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祭之以禮(생사지이례 사장지이례 제자이례)(위정 5장) '부모가 살아계실 때 예의에 맞게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의에 맞게 장사 지내고, 예의로써 제사 지내는 것'이라 말이다. 맹의자에게는 禮예, 예의와 법도가 효의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부모에게 예절에 어김이 없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禮예'일까? 주자는 이것을 두고 '分數분수에 맞는 예절'이라 말한다. 아마도 맹의자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리라. 그래서 공자는 자기 분수에 맞는 예로써 부모를 섬기라고 말했을 것이다.


孟無伯맹무백에게는 다른 孝효의 기준이 세워진다. 맹무백이 효에 대해 묻자, 공자는 父母 唯其疾之憂(부모 유기질지우)(위정6장) '부모는 오로지 자식이 병들까만 근심하신다'고 말하였다. 부모의 마음을 대변함으로써 효에 대해 돌려 말한다. 부모는 왜 자식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일까? 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식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낳아주고 길러준 육신을 잘 돌보는 것은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효의 도리이다. 그래서 내 몸 지키기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주자는 이 대목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부모가 자식의 건강만 염려할 수 있도록,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걱정거리를 드리지 말라는 의미로까지 읽는다. 불의한 일이나 불미스러운 일에 엮여서 부모를 근심시키게 하지 말고, 오로지 건강 하나만 염려토록 하는 것도 큰 효도 중의 하나라고 말이다. 부모의 마음을 짐작해봄으로써 효에 대한 여러 방법을 생각해 보게 된다.


공자는 子游자유에게 敬경, '공경하는 마음'을 제시한다.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금지효자 시위능양 지어견마 개능유양 불경 하이별호)(위정 7장) 지금 흔히 말하는 효는 봉양(먹고살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던데, 개와 말을 키우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으니, 공경하지 않는다면 가축을 키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냐고 말이다. 아마도 자유에게 부모 봉양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나 보다. 단순히 먹고 살 수 있게 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나까지도 뜨끔하다. 나는 얼마나 부모를 공경하고 있는가. 내 할 도리만 다 하면 된다고 생각해 온 것은 아니었는지 말이다.


마지막으로 子夏자하에게는 色색이 등장했다. 色難 有事 弟子 服其勞 有酒食 先生饌 曾是以爲孝乎(색난 유사 제자 복기노 유주식 선생찬 증시이위효호)(위정 8장) 공자는 자하에게는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며, 제자가 수고를 대신하고, 식사를 먼저 드리는 것이 낯빛을 부드럽게 하는 것보다 어찌 효라고 하겠느냐고 말한다. 色색, '얼굴빛'이라는 한 마디로 부모를 대하는 태도를 꼬집고 있다. 자식으로서 부모 앞에서 얼굴 표정까지도 신경을 써서 부모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부모의 수고를 덜고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이다.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하의 얼굴은 부모를 긴장시키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제자들에게 개별적으로 다른 효의 지침을 내려주었지만, 종합해보면 孝효란 분수에 맞는 예절로써 부모를 대하고(禮예),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며(敬경), 내 몸을 잘 지키며(疾질) 낯빛을 온화하게 하여(色색) 부모를 근심하도록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읽으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과연 공자는 내게는 어떤 지침을 내렸을까? 나 스스로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가슴을 꼬집는 듯하다. 禮예, 疾질, 敬경, 色색, 이 중에 가장 마음을 울리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할 수 있는 효도와 해야만 하는 효도


<논어> <위정> 5-8장을 읽다 보니,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효도'와 '진정으로 행해야 하는 효도'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제자들에게 개별 맞춤식 효의 도리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禮예, 疾질, 敬경, 色색 중에,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으로만 효를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모가 바라고 내가 정말 해야 하는 것은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된다. Can의 영역만 다루고 있을 뿐, Must의 영역은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효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할 수 없는 영역을 노력해서 해야 하는 것이 효도인 것일까?


유은실, 홍선주 <심청전> (그림책보다는 소설을 권한다)

<심청전>을 효의 굴레에서 읽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할 수 있는 효도'와 '해야만 하는 효도'라는 생각의 틈에서 가장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심청이다. <심청전>은 심청이 눈먼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아버지와 전국의 모든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는 이야기다. 내가 <심청전>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開眼개안(눈 뜸)'이다. 나는 이 이야기의 핵심을 '눈'으로 본다. 맹인 아버지 심봉사는 부모로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자기 세계에 갇혀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마음의 눈이 먼 모든 부모를 가리킨다. 심봉사는 心심, 마음이 봉사인 사람으로 읽을 수 있다. 반면에 심청은 心심淸청, 마음이 맑은 사람이다. 沈淸심청(가라앉을 심, 맑을 청) 또는 心睛심정(마음 심, 눈망울 정)으로 확장하여 여러 의미를 추론할 수 있지만, 이야기 속의 심청이 '마음이 맑은 사람', 또는 '누군가의 눈망울이 되어주는 인물'임은 부인할 수가 없다. 맑고 깨끗한 청이가 눈먼 아버지와 온 나라의 우매한 백성들을 깨우쳐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심청은 효의 대명사로 읽힌다. 일곱 살이 되면서부터 아버지의 식사를 봉양하였으며, 아버지가 눈 뜨고 싶다고 덜컥 약속해버린 공양미 삼백 석을 대신하여 구해준다. 심청이 스스로의 몸을 판 행위의 정당성을 두고, 효도인지 아닌지 분분하게 논할 수는 있으나, 결과적으로 눈이 멀었던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준 은인이 되며, 심청의 행보는 모든 이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심청전>은 일전에 초등 교과서에 수록되어, 심청의 효도를 두고 효녀인지 아닌지를 찬반 토론을 하도록 했었는데, 고전 연구자들에게 이야기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시키지 못하는 수업 목표와 내용이라는 질타를 받고 초등 교과서 속에서 아예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현재는 중등 이상의 고전소설 콘텐츠로 쓰인다. 하지만 심청이 효녀인지 아닌지,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가 효도인지 아닌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문제적이라고 인지된 부분이다. '以孝傷孝이효상효'라 하여, 효로써 효를 상하게 하였다고 이름까지 붙어 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겠다는 효의 목표와 자신의 몸을 파는 불효의 방법론, 둘 간의 대립 속에 심청은 왜 불효의 길을 가야만 했을까? 공자는 분명히 말한다. 자기 몸을 잘 돌보는 것이 효의 기본이라고. 심청 역시 자기 몸을 파는 것이 진정한 효도의 방법이 아님을 알았을 텐데 말이다.


以孝傷孝이효상효에서 나는 '할 수 있는 효도''해야 하는 효도' 사이의 맥락을 읽고 싶다. 심청은 자신의 몸을 팔지 않고 장승상 댁 수양딸이 되어 공양미 삼백 석을 마련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 곁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부처님께 눈 뜨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심청이 '쉽게 할 수 있는 영역의 효도'다. 하지만 심청이 그렇게 아버지 곁에서 수발들면서 지낸다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줄 수 있었을까? 단연코 아닐 것이다. 심봉사의 눈은 그냥 물리적인 눈이 아니다. 마음이다. 부모의 도리를 못하고 오히려 철부지 아이가 되어있는 심봉사. 그를 깨우쳐주는 일은 자신밖에 없었음을 심청은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심청은 '해야만 하는 효도'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인당수에 몸을 던져 새로운 물결을 만들고 심봉사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이끈 것이다. 부모를 상심케 한다는 것에서 효가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은 孝효의 영역을 벗어난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어두운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방법이 된다. 심청이 아버지의 눈만 뜨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는 <논어> <위정> 5-8장에서 효를 두고, 禮예, 疾질, 敬경, 色색, 네 가지를 이야기하였다. 심청이 아버지 곁에서 조용히 보필하는 것이 정말 공자가 말하는 효도였을까? 그것 또한 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눈도 멀고 마음이 먼 어린이 같은 부모에게 어찌 예의와 공경과 평온한 안색이 드러날까. 심청의 입장에서 효도는, 할 수 있는 쉬운 방법으로 아버지를 봉양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어려운 방법으로 아버지를 빛의 세상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내가 가야만 하는 길


내가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심청전>이라 해석하면서 불필요하게 비장해졌다. 심청이는 여러모로 나의 눈까지 뜨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이기에,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마음에 큰 파장이 일어난다. 심청의 모습을 통해 '할 수 있는 효도'와 '해야만 하는 효도' 사이를 곰곰 씹어본다. 나는 어떤 효도를 해야 하는 것일까?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굉장히 개별적이기 때문에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들일 다를 것이다. 공자는 나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지 궁금해진다. 내가 우리 가족을 위해, 내 주변을 위해 진정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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