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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oungKim Jan 15. 2021

"내가 가는 길이 어디로 가는지"

마흔에도 계속되는 정체성 앓이



올해 마흔이 되었다. 마흔이 되었다고 특별한 일이 생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흔은 숫자일 뿐이며, 서양 나이로 보면 마흔도 아니긴 하다. 그럼에도 마흔은 생애주기에서 절반쯤 온 나이이고 점점 몸이 늙어 체력의 고점을 찍고 내려오는 것을 느끼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 역시 마흔이 되자마자 병원행이다. 아이 엄마가 되기 전에는 병원은 왜 가는 거지? 싶은, 감기 하나 안 걸리던 나였는데 엄마가 되자 산부인과를 시작으로 아이들 병원, 그리고 마흔 초입인 오늘 CT를 찍으며 정점을 달린다. 오늘 병원 얘기나 건강 얘기를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최근 대학 병원에 갈 때마다 느끼게 되는 마음을 돌아보고 싶어서이다.


오늘 CT를 찍기 위해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대기를 했다. CT 촬영실에는 젊은 여자 의사, 젊은 남자 의사가 하얀 가운을 입고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들은 예뻤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음에도 예뻤다. 무엇이? 그들의 젊음이? 아니면 그들의 직업이?


집에서 올해 6살이 된 큰 아이와 올해 돌이 된 둘째 아이를 동시에 재우며 죽은 듯 자는 척했다. 이런 시간엔 머리만 기가 차게 돌아간다. 오늘 병원에서 본 의사들을 떠올린다. 어쩌면 다른 세상의 또 다른 나는 의사가 되어 저들처럼 하얀 가운 입고 긴 머리를 질끈 묶고는 전문용어로 얘기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 누군가 나에게 '의사'라는 길을 가르쳐줬다면 가능했을까?


문득 나의 젊은 시절,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된다. 누군가가 나에게 의사가 되라고 알려줬다면 나는 의사가 되려고 노력했을까? 누군가가 나에게 작가가 돼보라고 했다면 지금 작가가 되어 있었을까?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가 나의 길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나는 저런 상상은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여전히 나는 마흔이 되어서도 내 길이 어디인지, 내가 서 있는 이 길이 어디쯤 인지도 모른다.








상담학 사전에 보면 정체성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 나아가고 있고 자신에게 맞는 집단이나 사회는 어디인가 또는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개념을 제시한 에릭슨(Erikson, 1950)은 '자아정체성이 청년기의 발달과업이며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실패한 청년은 역할 혼돈을 겪고, 자신의 인생 목표를 설정하지 못하여 다가오는 성인기의 발달과업, 즉 진로선택, 직업선택, 배우자 선택 등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였다 '  


나는 내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그저 남들이 내게 전해준 과업을 진행할 뿐이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므로 아이들 챙기는 데에만 급급하다. 그리고 부모님의 딸이니 딸로서의 역할을 하고 시댁에서는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여전히 나는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고민을 왜 마흔이 돼서야 시작하게 되는지 참 답답하며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고민은 조급함을 일으켜 초조하게 만든다. 청소년기에는 그러한 고민과 방황이 당연한 것이고 시행착오를 할 시간이 있지만 마흔이 돼서는 시행착오를 할 시간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어린아이 둘을 가정 보육하다 보면 내 입에 넣을 밥도 못 챙기기 일쑤이며 그래서 빈혈이 오고 몸이 아파 병원에 가게 되는 게 엄마들이니까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체성 혼란까지 오게 된다.


에릭슨의 말을 따르면 나는 청소년기에 자아정체성 확립이라는 발달과업에 실패했다. 그래서 그 후 진로선택, 직업선택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내 경우엔 맞는 말이다. 그저 흘러가는 데로 직업을 찾아 들어가다 보니 힘들었고 적성에 맞지 않았고 방황했다. 그 방황은 아직도 계속되는 듯하다.


그런 나에게 2017년 책과 글쓰기가 다가왔다. 읽고 쓰고 하다가 2020년은 코로나와 둘째 출산으로 손을 놓았다.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보다 다른데 정신을 쏟았다. 그러다 2020년 말 우연히 신청한 브런치 작가에 합격하면서 글쓰기가 다시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쓰기 시작했다.







엄마가 되어 책과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함(외부 요인) 때문이긴 했다. 그러나 그 외부요인이 나를 알아야 함이라는 내부로 회귀되었다. 나를 알아야 아이도 잘 키우게 되기 때문에 나를 알고 싶어 졌다. 그렇게 시작된 계기가 결국은 내 정체성까지 건드리게 되었다.


엄마가 된 후  '나'라는 존재에 대해 스스로 내린 정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도대체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어 하는 인간일까 생각하다 보면 여전히 잘 모르겠고 혼란스러운 거다. 젊은 시절처럼 그 혼란을 새로운 일 시작이나 경험으로 쌓기에는 엄마는 한정된 시간과 공간을 갖고 있으므로 제약이 따른다. 그러다 보니 결국은 간접경험인 책으로 돌아오게 되고 읽으며 느끼고 그러다 쓰게 되는 일의 반복이 된다.


마흔이 되어도 여전히 나는 혼란스럽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러한 고민 끝에는 그저 하고 싶은 일, 혹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결론 내린다. 그게 바로 지금 이 것, 글쓰기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면 나는 의사가 되어 있었을 수도 작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내 인생에서 어린 시절 누군가의 개입으로 내게 의사나 작가나 다른 길이 열렸다면 그쪽을 따라 당연한 듯 걸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세계의 나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다른 환경과 다른 가족과 다른 지위. 그러나 한 가지는 동일할 것이다. 나는 그 세계에서도 쓰고 있을 것이다. 일기든 SNS든 무엇이든 나는 아마 쓰는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읽고, 무엇이라도 쓰는 그러한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하다면 나는 무엇이 되는가에 고민을 집중할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집중했어야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진정한 내 정체성일 테니 말이다. '읽고 쓰는 삶'이야말로 내 삶에서 떨어뜨릴 수 없으니 말이다.







<길_GOD>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무엇이 내게 정말 기쁨을 주는지 돈인지 명옌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아직도 답을 내릴 수 
 없네~~ 
 

자신 있게 나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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