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아무도 모르는 동굴에 들어가고 싶어 진다. 날 아무도 모르고 그 어떤 위험도 없는 곳에서 돌돌 웅크리고 가만히 있고 싶어 진다.
세상에서 전달되는 무수한 사회적 신호들이 바늘이
되어 나를 찌르는 느낌일 때 그러하다. 그 바늘들이 예민해진 내 피부를 따갑게 하고 나는 그를 차단하기에는 연약하다.
SNS를 통해 전달되는 잘난 사람들, 톡을 통한 무수한 대화, 해야 하는 자잘한 일들. 이런 거 다 내려놓고 숨어들고 싶은 거다. 스스로 SNS를 끊고 톡을 안 보고 뉴스도 듣지 말면 좋은데 쉽지 않으니 모든 게 차단된 동굴에 들어가서 그냥 하늘만 보고 싶은 거다.
때로는 생각도 멈춰버리고 싶기도 했다. 생각이란 게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얼토당토않은 방향으로 가버리니 때로는 머리가 쓰레기로 꽉 찬 느낌이기도 했다.
학생 시절 국어시험은 항상 89점 언저리였다. 꼭 90점은 넘지 못했다. 국어 시험에서 질문을 읽다 보면 처음 출제자의 의도 깊은 곳에 숨은 의도가 있을까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답이 헷갈리게 되고 틀리게 된다.
언제나 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말하는 숨은 의도를 파악하고자 애를 썼다. 혹시 저 사람이 나를 비난하거나 나를 속이려 드는 건 아닌지 미리 알아채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뒤통수 맞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느니 미리 거리를 두었다. 당하느니 애초에 시작조차 않는 것이다. 연약한 내 속살이 들킬까 딱딱한 갑옷으로 무장한 집게발 같이 말이다. 그렇게 웅크리고 가시를 세우다 보니 내 주위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제는 내 이런 성향을 알아 바꾸려 해도 되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는 모든 순간에 자동적으로 가시를 세우게 된다. 내가 놓친 건 없는지 내가 이해 못 하는 건 아닌지 신경을 곧추 세운다. 고슴도치처럼 뾰족하니 레이다를 세운다. 남들 다 아는 정보도 나만 모르면 안 되니 더 뾰족 세운다. 나만 모르다 뒤통수 맞으면 마음이 너무 쓰릴 테니까.
요즘이 좀 그러하다. 밖을 향해 드러낸 가시들을 접는 것은 안 되니 그냥 숨고 싶어 진다. 해야 할 과제와 공부도 다 내려놓고 드라마의 웃음 속으로 도망쳤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니 온전히 홀로 있을 수도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대안이 드라마와 유튜브다. 다른 이야기를 최대한 생각 없이 보고 웃고 운다. 물론 틈틈이 아이들 챙기는 건 어쩔 수 없다. 드라마 한 편 온전히 본 적은 없지만 일단 티브이를 켜고 신경 레이다를 최대한 가상세계에 돌려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나는 심리적 동굴에 앉게 된다.
잘 나가는, 잘 키우는, 잘 되는 타인들의 소식에서 멀어지고 해야 할 의무의 무거움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도록 내 신경을 드라마에 빠지게 만든다. 그렇게 잠시 다른 세상으로 신경을 쏟다 보면 어느새 다시 원래 자리로 가고 싶어 진다.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쳇바퀴를 돌리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