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약을 넣을 때 결혼 후 7년까지가 신혼 공급으로 청약이 가능하고, 대출도 결혼 7년까지는 신혼 우대로 금리가 저렴하다. 그런데 나는 결혼한 지 5년 차로 나라로 보면 신혼이지만 우리의 신혼은 끝난 지 오래다.
5살 1살 아들 둘 엄마인 나는 요즘 걸핏하면 신랑 험담을 하게 된다. 맘에 안 드는 구석, 눈에 걸리는 구석이 참 많다. 왜 변기커버는 안 올리고 싸는가? 왜 양치는 돌아다니면서 하는가? 왜 자는 아이를 뽀뽀한다고 깨우는가? 왜 밥 먹을 때 소리 내는가? 왜 밥을 그리 많이 먹는가? 왜 쉬랄 때 안 쉬고 더 힘들어하는가? 등등
이런 것들이 결혼 초기, 신혼 때 아무렇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는 잔소리를 하거나 아니면 그냥 눈 감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잔소리조차도 짜증이 되고 눈 감는 것조차도 짜증이 난다. 왜 매번 같은 잔소리를 하게 하는가?
아이는 감기로 콜록, 훌쩍, 신랑도 감기로 훌쩍. 아침 시간 둘 다 내 말을 안 들어서 그런 거라며 잔소리해댔다. 그 날 늦은 밤 훌쩍이며 일하고 있을 신랑을 생각하며 친언니가 내 결혼 직전 해준 말이 생각났다. 다른 무엇보다 남편에 대해서 측은지심을 가지라고 했다. 그때는 그냥 별것 아닌 말로 넘겼지만, 한 해 한 해 결혼생활이 길어지면서 종종 생각나곤 한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2016년 평소 싸운 적 없던 우리가 참 자주 싸웠다. 매일같이 신랑은 새벽에 오고 출장이 잦았다. 결국 폭발한 나에게 신랑은 그럼 회사 그만두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울고 신랑은 한숨 쉬었다. 너무 힘들다 못해 쓰러지기 직전이고 남편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 속상하여 터질 것 같아도 '측은지심' 그 말만은 잊지 않았다. 신랑이 누가 더 힘드냐는 식의 말을 할 때마다, 언니가 말해주었던 '측은지심'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당신도 나도 다 힘든 거다. 힘든 걸로 순서 메기지 말자'라고 말했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흥분하여 서로에게 겨누었던 칼날이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그 한 단어가 나를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꺼내 주었다.
아이가 커 나가면서 점점 싸우는 횟수도 내가 우는 횟수도 줄어들었고, 각자의 취미생활도 가지게 되었다. 이사를 해야 하면서 신랑은 청약을 넣기 시작했다. 아이가 아프기도 해서 그 부분은 오롯이 신랑에게 맡겨 두었다. 그러나 분양이 생각만큼 되질 않았고 결국 분양 당첨이 아니라 분양에 유리한 지역으로 이사 가기로 했다. 이사 갈 집을 구하는데도 신랑 혼자 다녀야 했다. 아이가 아팠기에 나와 아이는 집에만 있어야 했다. 신랑은 회사 다니며, 홀로 집 구하며, 전세대출 알아보며, 분양 알아보며 고군분투했다. 힘들다 한 마디 안 하다가 어느 날은 너무 힘들었던지 나보고 좀 알아보고 관심 좀 가지라고 한 마디 하기도 했다.
이사 후 청약을 또 넣고 당첨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복잡한 서류 준비와 돈 준비도 신랑이 뛰어다니며 했다. 주말엔 아이와 놀아주느라 바쁘고 평일엔 일과 청약으로 바빴던 신랑. 힘들단 얘기도 거의 없었던 신랑이 어느 날 밤 미래가 암담하다며 아들이 나중에 원망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분양 넣은 곳에 겨우 예비로 붙었지만 그 예비순위가 너무 뒤라 당첨되긴 힘들었던 때였다. 신랑 이야기를 들어보니 분양 알아보며 현실을 알게 되니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천정부지 같은 집값과 모아도 모아도 그 근처에도 못 가는 예금에 미래가 보이질 않았다. 어디 도움받을 곳 하나 없는 우리는 그저 우리가 열심히 알아보고 열심히 사는 것 말곤 할 게 없는 서민이었으니 말이다. 계속 알아보고 노력하고 해도 발끝도 닿질 않으니 힘들었었던 모양이었다. 신랑이 처음으로 부정적이고 어두운 내색을 비췄다. 원래 염세적인 나와 달리 어떤 일에서든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었기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무심한 나는 그제야 일 년 넘게 청약으로 고생하던 남편의 고충을 겨우 깨달았다.
다음날 아침 신랑이 출근하고 3년 전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찍었던 사진을 보았다. 어느덧 3년 만에 이 사람도 늙었구나 싶었다. 나는 아픈 아이가 후유증이 없도록 보살피는데 지쳤고, 신랑은 이사와 분양을 알아보느라 지쳤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신랑의 사소한 문제들은 덮기로 했다. 뭐 예를 들면 말도 없이 갑자기 주말 마라톤을 간다던가 하는 일 말이다. 늦은 시간 배터리 나가서 연락 안 된다거나 같은 거 말이다. 어차피 보통 밤늦게 오기에 평일 육아는 오롯이 혼자 하니까 이해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말에는 신랑 운동 시간을 내어주기로 했다. 내가 홀로 카페에 가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것이 힐링이 되듯이, 신랑은 운동이 그러하기에 보내준다.
신랑에게도, 남자에게도, 특히 아빠에게도 회사와 집이 아니라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줘야 나도 당당히 내 시간을 요구할 수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사 후에는 신랑이 독서모임 다시 안 나가냐고 말하곤 한다. 이사 오기 전에는 매주 독서모임에 나가니 신랑이 싫어하는 눈치였는데 이사 후에는 오히려 나가라고 한다. 본인도 맘 편히 운동하고 싶은 거다.
나는 대학 졸업 후 한 제조 회사에 취직했다. 내가 취직한 회사에는 남자들이 90% 이상을 차지했다. 그나마 우리 팀이 여직원이 있었고 다른 팀에선 여직원은 서무 정도가 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내 상사도 동료도 대부분 남자였고, 싸우거나 협력해야 하는 다른 팀 사원들도 다 남자들이었다. 게다가 우리 팀은 제품과 공정의 문제를 찾아내고 태클을 거는 일을 하는 부서이기에 다른 팀과 사이가 좋지도 않았다. 그래서 많이 싸워야 했고 무시당하면 안 됐다. 그런 회사에 취직하여 여자로서 차별도 당하기도 하고 남자들이 겪는 어려움도 보게 되었다.
그렇게 버티며 한 해 한 해 지나 진급도 하고 인정도 받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내 젊음과 내 모든 에너지가 싹 빠져나간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내 안이 텅텅 빈 듯한. 회사에 내 모든 것을 착취당하고 피 빨린 느낌을 받았다. 그때가 회사 다닌 지 6년 차 되던 해였고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캐나다로 도피하든 놀러 떠났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 약한 우울증, 만성 우울증을 달고 살았나 보다. 풀리지 않는 피로는 둘째로 치고 시력도 떨어지고, 치아도 상하고, 위염은 달고 살고, 자궁도 안 좋아지고, 툭하면 어지러웠다. 휴일인 토요일도 일하고 토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까지는 그저 집에서 누워만 지냈다. 하루 한 끼 정도 배달음식 먹고 나머지는 맥주와 안주로 때우고 그냥 새벽까지 티브이만 보다가 늦게 잠들고 늦게 일어나던 주말. 그냥 그렇게 멍하니 시간만 날려 보낸 주말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이면 회사 가는 차 안에서 사고 나길 바라기도 하고, 전철 탈 때면 뛰어내리고픈 욕구에 시달리고, 높은데 올라가면 떨어져 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술자리에서 폭음하게 되고 다음날이면 내 머리를 치고 한탄하며 죽을 것 같다며 출근하던 시절이었다.
회사 그만두고 캐나다에 가서 실컷 놀면서 나는 우울증에서 조금 벗어났고, 한국에서 재취업하고 취미생활을 가지면서 점점 벗어났다. 취미로 오랫동안 하고 싶던 피아노를 배웠는데 피아노보다도 회사 외에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더 소중했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재취업한 회사는 전에 회사보다도 더 깡패 같은, 아니 양아치 같은 회사였다. 과장, 팀장들도 임원들과 상사 앞에서 인격 모독당하고 무시당하는 걸 수 없이 봐왔다. 수십 명 아래 직원이 있는 팀장을 복도에 손들고 서 있게 시킨다거나, 다른 팀원 모두 있는 회의실에서 모욕하면서 혼내고 그만두게 할 거라는 둥... 그 팀장과 과장들은 모두 아이 아빠였다. 자식들과 통화하는 걸 들으면 깜짝 놀랄 다정한 아빠였다. 그러나 회사에선 자기보다 한참 어린 부하직원 앞에서 혼나고, 초등학생처럼 벌서게 시키질 않나 욕을 하질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그 자리로 출근하는 그들을 보면서 가장으로서 그들의 무게가 느껴졌다.
우리네 남편들도 20대의 나 같은 우울증이 없으리란 보장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모멸과 멸시 속에 이렇게 살아야 하나 생각하면서도 아무 표정 없이 집으로 들어가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음날도 내 인간성을 죽이는 자리로 돌아가는 건지 모른다. 그들이 쳇바퀴 돌아가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장이라서 일 수도 있지만 그곳 밖에는 갈 곳이 없다는 절박함 때문일 수 있다. 다른 대안이 없고 그곳 말고는 다른 곳을 볼 수 없도록 훈련받았으니 말이다. 옆을 가린 경주용 말처럼 그들에게 사회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그곳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조금 측은지심을 가져보며 남편을 바라보는 건 어떨까. 어쨌든 간에 내 아이를 가장 많이 사랑해주는 남자가 이 사람이니까 말이다. 내 아이가 아플 때 나 말고 가장 먼저 달려가고 마음 아파할 사람도 이 사람이니까 말이다.
이러한 그들에게 그래서 반드시 취미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자신만의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그 무엇, 그 시간이 반드시 말이다. 남을 위한 시간은 내 에너지를 채워주지 않는다. 써 댈 뿐이다. 내 에너지를 채우는 데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가능하다. 에너지를 채우면 스트레스도 줄어든다. 대신 그 개인 시간은 아내와 조율 후에 써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채운 에너지는 다시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여자들도 바쁘다. 요즘은 일도 육아도 완벽을 바라는 세상의 눈들이 많아져서 더더욱 힘들고 바쁘다. 여자 역시 바쁘고 내 시간도 못 내지만 남편도 그럴 수 있다. 조금만 측은지심을 가져보면 남자의 인생도 쉬운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여자도 힘들지만 남자도 힘들다. 내가 힘들다 해서 네가 덜 힘든 게 아니다. 각자 힘든 부분은 분명 있는 것이고, 한쪽만 힘든 것 같다 하면 서로의 시각 차이 이거나 상대를 이해 못하는 문제일 수 있다. 언제나 어디서나 얘기를 듣지만 이때에도 역시 대화가 필요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만 힘든 것 같다 하면 대화를 해보고, 그게 아니라면 상대를 측은히 여겨주자. 너도 사느라 힘들지?
오늘도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해주고 다독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부터도 바가지를 덜 긁어야겠다. 하루에 하나라도 잔소리를 줄여보기로 해야겠다. 당장 화장실 환기팬을 매일 꺼 놓는 것부터 말이다. 과연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