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 중심주의 시대, 한국 경제의 길 찾기
지난 11월 26일,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에 따르면, 중국에서 애플의 새로운 기능인 ‘애플 인텔리전스’가 탑재된 아이폰을 출시하려면 자국의 AI 모델을 사용해야 승인 절차가 용이할 것이라는 중국 고위 관계자의 발언이 보도되었습니다. AI 시스템에 활용되는 대규모 언어 모델(LLM)이 다양한 정보를 수집, 학습, 분석, 그리고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안 차원에서 자국 AI 기업을 통해야 한다는 설명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FTA 기반의 자유무역이 대세였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철강, 석유화학에서 중국과 인도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전쟁으로 유럽이 천연가스 공급에 어려움을 겪는 등 자국 경제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제 세계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공급망을 안정화하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친구가 없다지만, 2024년 현재, 각국은 보호무역을 기반으로 한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미국 반도체 산업 보호를 위한 이른바 ‘칩스법(CHIPS Act)’,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그리고 미국 빅테크 기업을 견제하기 위한 ‘디지털세(Digital Service Tax·DST)’ 등으로 기존의 무역 구조는 빠르게 재편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출 중심 경제 구조를 가진 한국은 필연적으로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한국의 제1 수출국이 중국이라는 점은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트럼프 정부 2기가 확정되며 국제관계는 물론 통상 분야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가 예상됩니다.
오늘은 자국 중심의 통상 정책이 속속 발표되고 있는 상황에서 각국의 정책 변화를 정리해보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한국 스타트업들이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짧게 적어보고자 합니다.
중국의 산업통상 정책은 아주 명확합니다. 첨단 산업에 꼭 필요한 핵심 소재를 무기로 삼고, 자국의 테크 기업을 통해 생태계를 구축하여 경쟁 우위를 차지하려는 모양새입니다. 이는 단순히 자원 확보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 이슈 속에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세계 최대 전기차 배터리 생산국이자 주요 소비 시장인 중국은 리튬과 희토류와 같은 전략 자원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2023년 상반기, 중국 국영 기업들은 아프리카 리튬 광산과 희토류 광산에 약 40억 달러를 투자하며 전기차, 반도체, 신재생 에너지 등 미래 산업에서 중국이 중심적 역할을 하기 위해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런 한편 중국 정부는 올 해 3월, ‘PC 및 서버 조달 지침’을 통해 모든 정부기관이 인텔과 AMD의 CPU와 윈도우 운영체제를 배제하고 화웨이 등 자국 기업의 제품을 사용하도록 했고, 2021년에는 국영기업들이 민간 클라우드가 아닌 국가 디지털 시설로 옮기도록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이외에도 10년 전 중국 시진핑 주석의 전기차 굴기 선언 이후, BYD와 상하이자동차그룹 등 중국의 전기차 기업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거대한 내수 시장을 통해 기술력과 몸집을 키워왔습니다. 현재는 세계 최초 전기차 1,000만 대 생산량 돌파는 물론 미국의 테슬라를 꺾고 BYD가 세계 1위 전기차 기업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최근 중국은 주요 국가들의 탈 중국화 흐름을 대비하고, 외국의 기업들에게는 높은 진입 장벽을 통해 중국 내 기업들에게 강력한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 1기 시절에는 대 중국 관세를 대폭 강화하며 무역 적자 해소와 자국 산업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 2기가 출범을 앞두고 있는 지금, 미국의 정책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강력하게 돌아왔죠.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해왔던 ‘CHIPS and Science Act’처럼 해외에 있는 자국 기업들의 리쇼어링을 지속 추진하면서, 해외 기업들 대상으로는 미국 외에서 생산된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고관세 정책을 펼칠 것을 예고했습니다. 이미 트럼프 당선인은 취임 첫날 중국에 대한 10% 추가 관세와 이웃 국가인 캐나다와 멕시코에 25%의 관세를 새로 부과할 것이라고 공표하기도 했죠.
특히 AI, IoT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요소인 반도체 산업은 미국은 물론 EU, 한국, 일본 등 전 세계가 공급망 관리 및 국가안보를 위해 자국 산업을 부흥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리튬과 갈륨, 희토류 같은 핵심 소재에 대한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미국은 현재까지 약 350억 달러 가량의 투자를 진행했습니다. 백악관에 따르면 이 투자를 마중물 삼아 민간 투자는 1000억 달러 이상에 달한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유럽연합(EU)의 산업통상 정책은 "환경과 규제로 글로벌 경제의 룰을 새로 쓰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명분으로 삼아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무역 구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재편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실제로 탄소 감축과 공정 경쟁을 내세우며 무역 관행과 생산 방식을 바꿀 것을 요구하며,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경제적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정책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있습니다. 2026년 시행 예정인 이 제도는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등 탄소 배출량이 많은 제품에 탄소세를 부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EU는 공정 경쟁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미국, 한국, 일본, 중국 등 주요 수출국에는 추가 비용 부담과 수출 제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시장법(DMA)도 EU의 주요 규제 중 하나로, 올해 3월부터 구글, 애플, 메타 같은 글로벌 IT 기업의 데이터 독점과 지배적 지위를 제한합니다. 이는 유럽 내 스타트업에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미국 빅테크 기업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며 EU-미국 간 갈등을 키우고 있습니다.
또한 5월 시행된 공급망 실사지침(CSDDD)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인권 및 환경 지속 가능성을 준수하도록 요구합니다. 이는 역외 국가들에게는 부담을 주는 반면, EU 기업들에게는 유리한 경쟁 환경을 조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다만, 동유럽 중소 제조업체들은 서유럽에 비해 자금력과 기술력이 부족해 이러한 규제를 충족하기 어려워, EU 내부에서도 경제적 불균형이 심화될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보호무역의 흐름 속에서 한국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한국은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인구와 국토가 작아 기술 혁신을 통한 대외 수출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가진 국가입니다. 2022년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입 비율은 102.0%로, 이는 미국(35.7%)이나 프랑스(85.7%), 영국(91.3%) 등 주요 선진국보다 훨씬 높은 수준입니다. 그리고 2024년 10월, 한국의 무역수지는 31억 7천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며 전년 동월 대비 증가했지만 시장 예상치보다는 낮았습니다.
자유 무역 기반으로 성장해온 만큼, 최근 심화되고 있는 보호무역 흐름은 한국에게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 1기 시절인 2017년 이후 한국은 미·중 무역분쟁 리스크와 EU의 친환경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우선 대 중국 수출 비중을 줄이고 중국 생산 공장을 베트남 등 아세안 지역으로 이전하는 한편, 대미 수출 비중을 늘리고 인건비가 저렴하지만 미국과 무관세 협정을 맺은 멕시코 등지로 공장을 건설하여 미국에 수출하는 니어쇼어링 전략을 펼쳐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트럼프 당선인이 베트남과 멕시코에 관세를 부과할 것임을 밝혀 한국 정부는 물론 기업들도 크게 긴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반도체, 배터리 등 주요 국내 기업들은 미국에 직접 공장을 세우는 등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EU의 CBAM에도 대응하기 위해 이전부터 한국의 주요 철강업체들은 수소환원제철 기술에 투자하거나, 제철 과정에 발생하는 부생 가스를 이용해 다른 전기로를 가동하여 탄소 발생을 최소화하는 생산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전략들은 단순히 규제에 대응하는 것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지속 가능성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는 만큼,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글로벌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면서 주요 수출국들의 자국 중심 정책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스타트업들에게도 높은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기술 혁신과 현지화 전략을 통해 이러한 환경을 극복해야 하는 미션을 안고 있습니다.
이에 발맞춰 2024년 5월, 중소벤처기업부는 ‘중소·스타트업 글로벌 지원 대책’을 발표하며 해외 인증 비용 지원, 현지 시장 조사, 글로벌 파트너십 구축 등 스타트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실질적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또한, 최근 구성된 ‘트럼프 2기 행정부 대비 중소기업 지원 전담팀(TF)’은 미국 보호무역 정책 강화에 대비해 맞춤형 지원 방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대기업들이 생산 기지 이전, 기술 혁신 등으로 보호무역 장벽을 극복하고 있다면, 스타트업들은 이를 새로운 시장 창출의 기회로 전환해야 합니다. 규제를 단순한 장애물로 보기보다 이를 활용해 차별화된 제품과 서비스를 설계하는 접근이 필요합니다.
플라즈마를 이용한 의료용 솔루션 기업인 플라즈맵은 2015년 창업 당시 정부로부터 예비 유니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스타트업 100대 기업 등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술력을 인정받아 2022년 기술 특례 상장을 이뤄내기도 했습니다.
유럽연합 CE 인증과 비 미국 국가 최초로 플라즈마 저온 멸균기로 FDA 인증을 획득하며, 유럽과 미국은 물론 일본 치과 의료기기 유통 시장의 주요 기업인 YOSHIDA와 계약하며 일본 시장에도 진출해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높은 장벽도, 더 높은 기술력이면 뛰어넘을 수 있다는 좋은 사례이기도 합니다.
또한, 직접적으로 규제를 뛰어넘지 않더라도 상대적으로 규제 허들이 낮은 아세안 지역이나 중동, 남미와 같은 지역에 먼저 진출하여 맞춤형 제품 설계와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통해 새로운 성공 기회를 얻을 수 있을 지 모릅니다.
파도가 클 수록 더 멀리 간다는 말처럼, 스타트업들은 이제 생존을 넘어 새로운 흐름에 올라타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글로벌 규제를 단순히 따르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혁신의 동력으로 삼아 독창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선도적인 역할을 맡을 때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는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