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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eman Jun 01. 2019

기생충, 상승에의 부러움과 하강에의 두려움에 관하여

봉준호의 검은 상자를 열어보다

스포주의: 기생충 관람 후에 읽어주세요.


무척 밝다. 봉준호 영화에서 이렇게 밝았던 적이 있나 싶게 밝다. 영화의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영화의 시각적 밝기가 그렇다. 봉준호는 밝은 곳을 눈이 부실 정도까지 밝힘으로서 어두운 곳을 더 어둡게 만들고자 한다.


영화에는 세 집이 등장한다. ‘밝은 집’, ‘반만 밝은 집’, ‘어두운 집’. 즉 영화에서의 계층은 세 가지로 나뉜다. 이로서 동일한 계급갈등을 주제로 다루지만 꼬리칸 사람들과 앞칸 사람들, 두 가지로 계층을 나눈 설국열차와는 궤를 달리한다. 어찌보면 설국열차는 보다 단순했다. 꼬리칸이 앞칸을 점령하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지, 라는 커티스의 막연한 희망이 현실과 부딪힐 때 그들의 세계 자체가 엎어진다.

이와 달리 기생충은, 말하자면 꼬리칸과 앞칸 사이에 걸쳐있는 존재들에 집중한다. 이들은 밝음과 어두움에 반씩 몸을 걸치고 지하에 반쯤 파묻혀 지상을 본다. 그들은 위를 보며 부러워하고 아래를 보며 두려워한다. 저들처럼 되지 않겠어, 라며 그들을 밟아내야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 상황을 봉준호는 말 그대로 구조적으로 연출하며 공간과 시간으로서 비유해낸다.

정보나 지식으로 비유될 와이파이 조차도 지상층의 자비 혹은 무지에 기생해야 하는 그들에게, ‘밝은 집’은 인식의 대상조차 아니었기에 부러움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들은 작은 세계에서 행복했다. 그러나 기우가 박사장네 대문을 넘어 계단을 올라갈 때 그들의 세계는 수직으로 확장되고 그 틈바구니에서 부러움이 탄생한다. 그들은 이제 확장된 세계에서 불행하다. 하강의 두려움이 그들을 짓누르고, 밝아지기 위해 (밝음이 아닌) 어두움과 싸운다. 마침내 상승의 유일한 방법, 만병통치약이 돈이라는 사실을, 그 욕망을, 학습하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현대인이 된다.


이 영화에는 봉준호 특유의 ‘작은 희망’이 없다. 눈내리는 한강 매점에서, 얼음이 녹기 시작한 설국에서, 옥자의 입에서 태동하던 그 작은 희망의 싹이 이 영화에서는 싹둑 잘려있다. 그래서 기생충은 봉준호의 필모 중 가장 밝은 영화이자 가장 어두운 영화다. 그런 이 영화가 황금종려를 받았다는 사실은 현실적으로 기쁘면서도 동시에 상징적으로 못내 씁쓸한 지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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