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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브 Jan 10. 2021

이불개기 프로젝트 300일, 단상

놀랍게도, 이불만 갭니다

2020년 8월 26일, 이불개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 300번째 이불을 갰다. 비록 완벽한 개근은 아니지만 나름의 의미를 담아 누추한 인증샷을 올려본다. 이 글은 각자의 누추한 이불을 300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함께 - 무려 3,629번씩이나 갠 이불개기 프로젝트의 단상이다.

이불 색깔도 빨리 블랙으로 바꿔야지


If you want to change the world, start off by making your bed.


1. 이불개기 프로젝트의 시작.

카카오프로젝트100의 베타 버전 '30일 프로젝트'가 시작된 2018년 11월, 록담의 소개에 이끌려 개설된 프로젝트 중 하나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중 듣도 보도 못한 이불개기라는 아이템으로 커뮤니티를 구성한다는 컨셉이 신기하여 시작했고, 누구나 한 번 즈음은 보았다는 그 전설의 유튜브 해군대장,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이불 정리부터 시작해' 영상이 내 주목을 끌었다.


결과적으로 30일간 이불개기를 하면서 내 일상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진 않았다. 그간 이불을 꾸준히 개 왔기도 했고, 정돈된 잠자리를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매일 아침마다 사진으로 공유한다는 컨셉이 신선하면서도 어딘가 미적지근하기도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에서 깬 직후의 정신없는 나를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에서 오는 오묘한 연대감부터 그들도 나와 같이 정신없는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에서 오는 일종의 안도감까지, 이불을 개서 누군가와 나누는 행위 그 하나에서 느껴지는 여러 감정들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 나는 이불개기를 낯선대학y2의 CA로 2019년 11월 다시 리부트 하였다.

이렇게 오래 할 줄 모르고 30일 프로젝트로 시작했더랬다.



2. 왜 이불인가 - 이 신박하고도 골 때리는 공유의 장.

카카오프로젝트100 소개 영상에도 나와있지만, '습관'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만든다는 것에는 엄청난 노오력이 필요하다. 작심삼일도 아니고, 3주도 아니고, 초인적인 힘으로다가 100일은 감내해야 겨우 만들어질까 말까 하는 게 습관이더라.

'습관을 만드는 것은 뇌에 회로를 만드는 일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국적으로다가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을 습관 하나 만들어보자는 의지는, 우선 절대 아니었다. 대개 내가 벌이는 판이 그러하듯 별 생각은 없었다. 낯선대학y라는 커뮤니티를 2년 넘게 운영하며 멤버들의 소속감을 고취시킬만한 새로운 CA가 필요하기도 했고, 이불개기는 더없이 좋은 아이템이었다. 처음 들으면 열 중 여덟아홉은 일상생활 행위 중에서도 가장 사소한 영역에 속하는 행위를 커뮤니티의 영역으로 끌고 온다는 설정에 이해 못할 표정으로 신기해하지만, 이내 '이불개기'의 선이 넘나들기에 꽤 수용 가능한 정도의 난이도라 그런지 흔쾌히 합류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이불을 정리하지 않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라며 자연의 섭리는 건들 수 없다고 쓰루한 분들도 많았고.


이불을 개는 행위의 개인과 커뮤니티 간 오묘한 선 넘기


그렇게 낯선대학y의 다양한 CA(낯선글쓰기, 낯선백수, 낯선책모임, 멜로에 낯선 체질 등) 중 하나로 낯선이불개기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4개월가량 낯선대학y의 서브 활동으로 운영되다가 운영의 안정성이 확보되며 독립된 활동으로 분리되어 지금까지 소소하게 운영하고 있다.



3. 그래서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2021년 1월 현재, 60여명의 이불개커가 무려 6천여장의 이불개기 사진을 인증해주었다.

참 특이한 것은, 바로 위에서도 언급했듯 '집' 혹은 '나의 방'은 개인의 가장 사적인 영역이다. 특히 침대는 더. 그런데 매일 일어나자마자 이불을 갠 나의 침대를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가득한 채팅방에 턱 공유한다.

정말이지 이불 사진만 올라온다

유일한 장치랍시고 갖춰놓은 것이 (1) 실명으로 참여하고, (2) 새로운 참여자는 기존 참여자의 초대로 연결된다는 룰 두 가지라는 점을 빼놓고 생각해본다면 기존의 커뮤니티와는 조금 다르다.

이불개기 인증하는 거 말고 별다른 톡이 없다

서로 누군지도 잘 모르고, 그닥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당연히, 연대란 없다


따지고 보면 정말이지 개개인의 습관 들이기에 최적화되어있는 활동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낯선 사람과 만나 소셜라이징을 해야 하는 부담도 없고, 누군가의 안부를 억지로 궁금해할 필요도 없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렇게 소셜의 형태를 띠고서는 막상 모래알 연대를 지향하는 활동이 되며, 초기 론칭 때부터 함께한 이불개커는 '완전한 습관이 되어서 인증샷 올리는 걸 까먹을지언정 이불은 개고 있다'며 '엄마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는 활동'이라는 간증도 곁들여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냐면,

1) 최소한의 강제가 있다: 디파짓 3만원과 페널티 그리고 인증시간.

디파짓은 매달 첫 주 일괄적으로 납부한다. 혹여나 인증을 까먹고 누락한다면 1회당 1천원을 페널티로 차감한다. 페널티는 차곡차곡 모여 뒤에서 언급하는 이불개기 눈덩이 프로젝트의 시드머니로 쓰인다.

인증시간도 있다. 처음에는 다 같이 직장인이겠거니 하는 생각에 아침 기상을 디폴트로 잡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첫 30일 프로젝트로 이불개기를 할 때 외국에서 참여하신 분이 있었고, 그분의 시차에 맞춘 이불개기 인증 시간이 지금의 인증 시간 체계를 다져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여기서 한 번 더 개정이 이루어졌는데, 1년 간 5,541번의 인증샷과 인증시간이 모이며 평일과 주말/공휴일에 인증이 몰리는 시간대가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 시간대를 기준으로 페널티 체계가 조금 더 세분화되었다.

한 줄 요약하자면, 꼭 아침에 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2) 그리고 리워드가 있다: 침대 머리맡에 둘 인형.

한 달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개근하여 인증을 하면 자그마한 리워드를 주고 있다. 리워드의 사이즈는 자그마한데 가격이 자그마하지 않아 문제긴 하지만, 지금까지는 침대 머리맡에 둘 인형을 보내준다. 다 큰 어른이 무슨 인형이냐 싶지만, 막상 하나 둘 놓아두면 더 모으고 싶고 시리즈로 구비해두고 싶은게 인형이더라. 카카오프렌즈의 꿀잠베이비프렌즈가 무려 7종류나 나와서 7개월 동안 리워드로 알차게 활용했다.

드래곤볼 7성구를 모으는 심정


4. 앞으로 어떻게 운영되나.

일단 눈덩이 굴리듯 판을 키워나가보고 있다. 사실 단순히 이불을 개서 습관을 만드는 활동에 한정 짓기보다는, 판 까는 걸 좋아하는 내가 아무런 목적과 수익 목표 없이 그때 그때 생각나는 기획을 갖다 버무리면 어디까지 사이즈가 커질 수 있는지 보는 실험의 장에 가깝다. 지금 진행 중인 것은,


1) 이불개커 크루넘버

일종의 멤버십이다. 훗날 이불개커의 커뮤니티 (이하 '개커뮤니티') 발족을 위한 사전 작업에 가깝다. 일정 기간 동안 일정 횟수만큼 인증하며 로열티를 보여준 개커들을 대상으로 원하는 크루넘버를 부여하고, 크루넘버가 새겨진 라이센스 플레이트까지 제작하여 이런저런 제휴와 특전을 넣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현실은 기획자 영혼까지 탈탈 털린다는 멤버십 프로그램
2) 이불전 ●■▲

올해 나의 중요한 개인 프로젝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불로 하는 전시회다. 이게 무슨 헛소린가 싶겠지만, 오랜 시간 개커들의 이불을 보고 있자니 거기에 각자의 삶이 반영되고 있었다. 이불의 패턴, 침대의 종류, 방의 조명, 가끔씩 앵글에 걸리는 방에서의 모습 등이 전부 개개인의 아카이브였다. 이를 한데 모아 각각의 이불개커가 큐레이터가 되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이불'이라는 매개체로 전시를 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연말에서 내년 연초를 목표로 전시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게 작년 낯선대학C 발표에서 일단 질러놓았다


그리고 내 특유의 일단 저질러놓고 보는 기획성으로, 이불전 크루가 결성되었다. 열 명의 크루가 전시회를 진행할 장소부터 콘텐츠 기획까지 마무리했으나. 코로나19와 개인적인 사정이 겹쳐 보류..되었다. 투자를 위한 제안서까지 만들 정도로 다들 진심이었던 기획이라 아마 상반기 내에 주목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짜치는 콘텐츠에 진심인 크루들이라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3) 그 외 헛소리

몇몇 친구와 이불개기의 리워드를 생각하다 침대 머리맡 조명, 룸스프레이, 캐릭터 인형, 잠옷, 이불, 향초 등 온갖 아이템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사적인 공간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아이템이 개인의 기호에 맞춘 -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라이프스타일 굿즈더라. 이걸 이불개기와 합쳐 어떤 눈덩이를 굴려볼 수 있을지 기분 좋은 망상을 가끔씩 한다. 일단 거한 헛소리로 뱉어본 건, '이불 개다가 라이프스타일 리테일까지 뛰어들자'였다. 이케아 보고 있나.


무튼, 별거 없는 습관 만들기에 60명에 가까운 이불개커 분들이 뚝심 있게 달려와주어 무려 300일 동안 중단 없이 운영이 가능했다. 작년 4분기에는 카카오프로젝트100 플랫폼에도 살포시 올라탔고, 인터뷰도 진행했다. ( (대단히 부끄러운 관종이므로 링크만 연결했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록담이 김미경 님이 진행하는 MKTV 채널의 "잘 키운 취미 하나 10직장 안 부럽다?! 2021년 새해는 밝았는데 뭐부터 해야할지 아직 모르겠다면 ? - MK SHOW 스몰비즈니스 백영선 편"에서 이 프로젝트에 대해 '재미있는 사이드 프로젝트'의 사례로 언급까지 해주셨더랬다... https://youtu.be/uOe_K4YtjM8?t=1093

그렇다, 이불개기의 진가는 퇴근 후가 진리다


덕분에 추진력을 얻어 잠시 보류했던 대대적인 리브랜딩을 다시 계획하고 있고, 이불개기 프로젝트를 위한 크루를 따로 모집하고 있다. 큰 기대와 목적 없이 주변인들과 '골때리겠닼ㅋ' 하며 시작한 이불개기가 이렇게까지 굴러올 수 있음에 아직도 늘 새롭고 설렌다. 이제 이불을 개는 행위 자체는 자연스러움을 넘어선 그냥 - 의식하지 않으면 이불을 갠 것도 모르는 - 루틴 중의 루틴이 되어 이불개기 자체가 더 이상 도전적인 액션은 아니지만, 이 사소한 움직임이 주변인들의 루틴을 어떻게 바꿨는지 경험했고, 거기서 파생될 콘텐츠의 잠재력을 이불개커 모두가 확인했기에 앞으로의 이불개기 프로젝트는 '오늘이 어제보다 조금 더 설레는' 대환장이 되지 않을까. 모쪼록 더 많은 사람들이 이불개는 재미를 느껴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한 데 모은 개인 브랜드 팀콥(team cobb)의 BLANKIT 프로젝트 리브랜딩



이불개기는 지금이라도 바로 시작할 수 있어요.

https://teamcobb.co/about-blank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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