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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캐처 Mar 14. 2024

아무 목적없는 사이가

편하고 부담없고 오래가는 관계가 된다

갑자기 연락이 와서 밥을 한번 먹자던 학교 선배는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느라 나이는 조금 많았지만, 나와 사회생활 첫 발을 비슷한 시기에 내딛었다.


M 으로 시작하는 큰 회사에서 보험 영업을 시작했다는 인사를 듣고도 나 자신이 당시 너무 치열하게 매 초 매 분 탈탈 털리고 있던 나머지 밥 먹자는 말에 들어 있는 진짜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고 약속을 잡았다.


사실 나는 그리 친하지도 않았던 선배가 부러 내 회사 근처까지 와서 밥을 사기에 적합한 타겟은 아니었는데, 내가 당시 눈치를 채고 있었다면 그 힘들고 먼 길을 오는 희망찬 걸음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거다.


가족이 보험설계를 다 마쳐서 더 이상 추가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색하게 웃으면서 밥을 먹고 어렵게 쑥쓰러워하며 본론을 넌지시 꺼내 주셨는데 내 답은 너무 간결했고 더 이상 그 이야기는 화두에 오르지 않았다.


가끔 '미안한 식사'자리로 기억되는 장면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아예 성사되지도 않았을 만남이 그렇게 끝났고 선배를 더 이상 볼 수는 없었다.


그 때 왜 그랬지? 하는 순간들이 있는데,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버려서 그 외의 것들은 아주 최소한의 에너지만 할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먼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마음이 조금 잔잔해졌을 때 느리게 두둥실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난 왜 그 때 그렇게 눈치가 없었을까? 라는 말이 이어지고 나를 탓하지는 않지만, 실망하고 속상했을 상대에게 미안하고 그렇게 그 기억을 떠올리며 상대에게는 닿을 수 없지만 나 자신을 홀로 다독이며 마음으로 사과한다.


여전히 일을 너무 많이 하는 편이라 아주 대단히 큰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은근히 누르고 있는 많은 사안들이 있다. 스스로 필 받아서 해버리고 있으니 그만 하라는 말도 안들리고 내가 멈추고 싶을 때가 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아무도 못 말리는 철저한 일중독자인 편이다.


그러나 그렇게 치우친 상태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이제는 몸도 마음도 내가 처한 상황도 균형과 조화를 추구해야만 더 오래 갈 수 있고, 위급하다는 신호를 무시해서도 안되니 각성하고 조금씩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나를 잃지 않고 성장시키는 방법이 꼭 일에만 열심히 매진하고 몰입하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주말 여행도 계획해 보고 봄바람을 쐬러 본격적으로 다녀봐야겠다.

 

여행 다니면서 보는 풍경은 전투적인 일터에서와는 전혀 다르다. 공기도 싱그러운 느낌, 사람들의 표정도 긴장없이 편안하고 유쾌하게 보인다. 주말도 없이 일에 대해 생각한지 오래되서, 계속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은 좋은 친구도 아닌데 계속 껴 안고 가는 '긴장'에 이제는 주말 이틀이라도 잠시만 멀어지자고 거리를 둘 예정이다.


'사실은 긴장 그 거 그냥 탁 놓아버려도 결코 죽는 건 아닌 그런 것'이라고 불안감이 높은 나 스스로를 꾸준히 설득해 보는 중이다. 쉽게 설득이 잘 안되는 '고집 오브 고집러'라서 꽤나 오래 걸릴 것 같지만 말이다.


서로 목적없이 만나서 사소한 이야기까지 길게 이어져 속 이야기까지 나눈 어느 다정한 분과 우리가 자주 만나지도 않는데 이렇게 친한 기분이 들고, 언제 만나도 편한 건 '목적없는 사이' 라서 그런 것 같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아무리 친하고 좋았던 친구도 돈 빌리고 빌려주는 일이 급 끼어들면 순수한 우정이 변질되듯이 목적이 생긴 사이가 처음과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마음 편하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 응원할 수 있는 사이는 '친구'가 되고, 가족이 줄 수 없는 또 다른 결의 유대감과 충만함을 서로 주고 받는다.


그렇게 조금씩 맺어지는 친구라는 선물 같은 관계에 대해 새삼 고마운 기분이 들고,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뭔가를 또 잘 해봐야겠다는 에너지가 생기는 것도 느낀다.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받는 입장에서는 작지 않은 라이킷 나누는 브런치스토리 작가님들과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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