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니 원래 부부는 그런 건가 싶더라구요
바로 엄마 아빠가 결코 헤어지지 않고 부부라는 이름으로 오래도록 같이 살던 모습이었어요.
늘 우당탕탕, 조마조마, 불안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언제라도 터질 듯한 폭탄이 도처에 널려 있는 전쟁터 같은 나날 속에서 꽤 오래 살았죠.
관찰자 시점에서 같이 있을 때 그리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고, 서로 대단히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으며, '칼로 물베기'라는 싸움은 대체 끝이 있긴 한 건가 참 답답했죠.
엄마의 말에 따르면 '자식을 두고 나갈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한 집에 사는 것 외에는 꼭 왜 같이 살며 늘 싸우고 그래야만 하는지 도통 이유를 찾을 수 없긴 했거든요.
어린 시절 이 부부를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엄마를 내 보호자가 아닌 그저 한 명의 '여자'라고 봤을 때 명백하게 '어서 하루라도 빨리 헤어져야 할 남편'으로 보이는데, 엄마는 끝까지 그러지 않았어요. 그럴 수 없는 건 저 같은 어린 자식들 때문이니 남이면 모를까 얼른 그러라고 등 떠밀 수도 없었고요.
아빠는 엄마에게 모진 소리를 참 많이 했는데, 제 귀로 듣지 못한 이야기도 어느 날은 구슬프게 또 서럽게 들려주셨죠.
'나보고 나가버리라고 했어. 울면서 한참 걸어가다가 자식들 때문에 장독대에서 발길이 더 안 떨어져서 다시 왔어.' 뒤꼍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쪼그려 앉아 소리없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엄마는 이 슬픈 이야기를 곁에 있는 저에게 들려줬어요.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 엄마들마다 다 있듯이 제 엄마도 그랬는데 불쌍함의 정도가 참 과하다 싶을 정도라 그저 짠하고 애잔한 마음이 들었어요.
아빠가 엄마에게 집을 나가라고 했다는 말은 저에게는 엄마를 소멸시키는 것이니 청천벽력 그 자체였어요. 너무 어린 나이에 들은 크나 큰 이야기라 '딱하고 불쌍한 엄마를 지켜야겠다'라고까지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곁에서 듣고 보아온 모든 것이 속상함 뿐이니까, 본능적으로 그 말의 충격이 제 무의식 심연 아주 깊은 곳에 아로 새겨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러고 저는 내내 조숙한 철든 아이로 살며 아무 사건 사고도 일으키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최소한의 용돈을 받고 씩씩하게 잘 살았어요. 누가 시키거나 간섭하지 않았음에도, 홀로 이 곳 저 곳 소음 없이 공부하기 좋은 호젓한 공부방이나 독서실이 있는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공부에 매진했죠. 공부는 그래도 제가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어서 다행이었어요. 엄마 아빠 싸움은 제가 막을 방법이 전혀 없었거든요.
가끔은 100점 빨간 색연필 동그라미가 크게 그려진 시험지도 가지고 오고 하니, 평소 그리 웃을 일 없는 집에서 가끔은 아빠 얼굴 가득 기쁨을 퍼뜨릴만큼 크게 웃는 모습을 보기도 했죠.
어쩌면 유일할지도 모르는 한 가지 희망, '자식이 잘 되서 우리도 얼굴 펴고 웃을 날이 올거다' 막연하지만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을 정도로 소소하게나마 기뻐할 작은 소식을 가져다 주는 그런 존재가 가끔이라도 되는 것에 나름 보람을 느꼈어요.
저도 물론 학교에서 예기치 못하게 생긴 크고 작은 속상하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당연히 집에 와서는 전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어요. 그리고 비가 오면 우산을 가져다 주는 다른 친구의 부모님이 부럽지도 않았고, 저에게는 그저 실내화 가방으로 머리를 어설프게라도 가리고 빨리 뛰어가는 그런 어느 날일 뿐입니다.
바라는 것도 없이 비교할 것도 없이, 그런 절망에 잠겨 쓸데없는 감정 소모에 빠져 있을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 해야할 것을 순서대로 하고, 그 무엇이라도 상의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존재나 마냥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저에게는 아예 없다고 여기고 살았어요.
각자도생 가족, 저의 현실 인식 수준의 기반은 보고 듣는 틀림없는 사실을 바탕으로 정확하게 장착되었죠.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양심적으로 부지런히, 또 주도적으로 살아오다보니 나름의 자부심도 있어요. 내 삶의 중요한 결정을 직접 모두 하고, 스스로 책임을 져 본 사람만 아는 것이 있는 것이죠.
대학교 진학 계획도 홀로 세우고, 입학 원서도 알아서 냈어요. 다행히 합격을 했고, 휴학 없이 정직하게 졸업까지 정상 속도로 마무리 했죠.
어떤 것을 바라거나, 요구하거나 쉬어가겠다는 등 그런 말할 틈과 한숨 돌릴 여유가 제가 소속된 집에는 단 1g 단 1cm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졸업 전에 취업은 무조건 되어야 했고, 나름 몇 달 고군분투를 하긴했으나 합격 소식 또한 졸업식 전에 무사히 순조롭게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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