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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Jan 29. 2019

완제품의 시대.

완성된 것들이 보여주지 않는 불편한 진실.


수년 전, 미국 TV 채널에서 어떤 리얼리티 쇼를 시청한 적이 있다. 전혀 관련 없는 두 가족이 2주간 서로의 집을 바꾸어 살아보는 흥미로운 설정으로 이루어진 에피소드였다. 첫 주에는 엄마들이 집을 바꾸고, 두 번째 주에는 엄마들은 본래 자기 집으로 돌아오고 아이들 중 한 명만 이동하게 된다. 예를 들어 형제 혹은 자매 둘 중 한 명은 집에 남고 다른 한 명은 다른 집에 가는 식이다. 엄마와 아이들의 격한 반응만 기억나는 걸 보니, 아빠들은 쇼에 등장하긴 했으나 역할이 미미했던 것 같다.


낯선 가족 구성원과 섞이게 된 이들은 2주 동안 여태껏 살아온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극한 체험이다. 쇼의 재미를 위해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정 반대의 환경을 맞바꾸었으니 말이다.


부유한 타운에 살며 방송계 일을 하는 엄마와 금융회사 임원인 아빠를 두고 사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한적한 농가에서 닭과 염소를 기르며 농장 일을 돕고 주로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서로의 삶을 살아보는 체험은 충격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농장 엄마는, 이민이라도 갈 듯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온 열두 살 소녀를 보고 놀란다. 편의상 이 아이의 이름을 케일라 라고 하자. 케일라는 디자이너 브랜드 청바지가 아니면 입지 않으며, 마당에 나가 놀자는 농장 아이들을 따라 나서면서도 신발이 더러워질까 봐 내내 신경 쓴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한 케일라를 위해 농장 엄마는 저녁에 특별 요리를 해주겠다고 한다. 케일라에게 닭고기를 좋아하냐고 묻자 다행히 그렇다고 한다. 농장 엄마는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마당에 나가 닭을 잡는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케일라가 비명을 지른다. You said we are going to have a chicken! (닭고기를 먹을 거라면서요!) 농장 엄마가 답한다. That’s what I’m catching. (그래서 지금 잡고 있잖니.) 순간 케일라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은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닭고기를 먹겠다고 했지, 닭을 죽이겠다고 하진 않았어요!”


그제야 농장 엄마는 깨닫는다. 케일라에게 “닭고기”란 예쁘게 포장되어 마켓에 나란히 진열된 상품이라는 것을. “오늘 저녁 닭요리를 먹자”고 했을 때 케일라가 응당 떠올리는 것은, 갈고리로 닭의 발목을 잡아채는 장면이 아니라, 잘 손질된 상품으로써의 닭고기를 신중하게 골라 카트 안에 넣어 구매하는 행위에 더 가깝다는 것을.


설마 열두 살짜리가 닭고기는 닭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나, 엄마를 따라 수없이 마켓을 다니면서도 진열대에 놓인 닭고기 한 팩을 보고 닭의 비명소리와 도살 장면을 연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눈에 잘 띄는 글씨체를 이용해 고안한 겉포장에는, “이 고기는 항생제를 먹이지 않았어요” 라던가, “우리에 가두어 키우지 않은” 따위의 문구가 적혀 있을 것이고, 정육 부서 직원의 손길에 의해 징그러운 껍질이 모두 벗겨진 채 희고 깨끗한 속살이 드러나면, 비로소 스티로폼 접시 안에 가지런히 담겨 플라스틱 포장지로 팽팽하게 씌워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종 소비자들은 굳이 혐오스런 장면을 연출하거나 손에 피를 묻히는 수고를 하지 않고도 깨끗이 다듬어진 재료로 편리하고 우아하게 요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Hassle-free 라이프 스타일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From the scratch 의 과정을 알기 바라는 건 애초에 무리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어릴 적부터 해산물을 그렇게 잘 먹었으면서도, 막상 어른이 되어 생선과 오징어를 손수 다듬으려니 눈알과 내장이 너무 끔찍하고 징그러워 차마 칼을 대지 못했던 적이 있다.


케일라는 방과 후 다양한 특별활동을 하느라 늘 바빴고 주말에는 엄마를 따라 방송국에서 여는 각종 파티에 참석하는 생활에 익숙해 있었다. 흙이나 자갈밭 대신 매끈한 대리석이나 카펫 위를 걸어 다녔다. 셰프의 손길을 거쳐 예쁘게 세팅된 음식에 익숙한 케일라에게는, 접시 위의 음식을 “식재료”로 인식하기 보다는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 여기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일 터였다.


각종 향신료와 소스에 버무려진 로스트 치킨을 먹으며, 닭이 어떤 과정을 거쳐 털이 뽑히며 끓는 물에 던져지는지 우리는 굳이 생각해 본 적도, 생각할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평생에 걸쳐 굳이 원재료나 중간 단계를 목격할 일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제조업은 주로 인구 밀도가 낮고 도시에서 떨어진 지방에서 이루어지며, 공정 과정과 유통 과정 역시 일반 소비자의 눈을 탈 일이 없는 공장, 도매상, 새벽 시장에서 이루어진다.


그림 그리는 물감이 아프리카에서 자라는 아카시아 나무에서 뽑은 고무액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음악 CD 의 재료는 모래알이며, 분필의 재료는 바다에 사는 갑각류의 미네랄 침전물이라는 것 또한.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입고 먹고 바르는 모든 것들이 실은 누군가가 땅에 심고 길렀거나 바다에서 채취한 것들의 완제품이다.


설탕의 최대 생산국인 필리핀에서 사탕수수를 심고 수확하는 작업은 극한 직업으로 불릴 정도로 살인적인 노동이다. 인력을 싸게 부릴 수 있기에 기계도 사용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심고 수확하고 손으로 껍질을 벗긴다. 4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질 좋은 설탕을 만들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때고 일정 온도를 유지하며, 낮이고 밤이고 교대도 없이 사탕수수를 갈아 액을 짜낸다고 한다.


설탕이 듬뿍 들어간 디저트를 먹으며 필리핀의 사탕수수 밭의 노동 착취를 떠올릴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유명 베이커리의 로고가 붙은 디저트를 먹으며 사탕수수를 재배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대신, 빠띠셰가 르 꼬르동 블루 출신인지를 따지게 되는 건, 우리가 이기적인 인간이라서가 아니다. End Products / Finished Goods 만 보게 되는 현대인의 삶 자체가, 모든 것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애초에 생각하게끔 하는 구조가 아니라서 그런 것이다.


우리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에 익숙하지 않다. 언젠가 공사가  끝난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뻥 뚫린 천장을 보고 기겁한 적이 있다. 훤히 보이는 시멘트의 민낯과 시커먼 파이프들도 무서웠지만, 은박지 같은 재질로 둘러싸인 튜브가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너무 흉물스러워 소름이 끼쳤다. 에어컨이나 히터가 통과하는 튜브인 것 같았다. 마감재나 타일을 붙여서 건축 자재를 감쪽같이 감추어 버리면 아늑한 실내가 된다. 그런데 얇다란 타일 하나 뜯었다고 나는 왜 그렇게 천장이 흉측하고 무서웠을까? 아파트도 도배지 하나만 뜯으면 시멘트 벽인데 말이다.


이렇듯 우리는, 단 몇 센티미터의 벽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살아도 되는 편리한 환경에 살고 있다. 어떤 것이 고장나더라도 그 분야의 전문가나 기술자가 와서 고쳐 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것도 깊이 자세히 알 필요가 없다. 우리의 편리함을 위해 완벽하게 만들어진 완제품을 “소비”만 하면 될 뿐이다.


21세기는 소비를 부추기는 시대요, 생산을 하더라도 단순히 의식주를 채우기 위함이 아닌,  Sophisticated 한 탐미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물건을 만드는 시대다. 우리가 할 일은 아름다움과 편리함을 갈망하는 것뿐이다.


세상의 모든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가끔은 인식하고 자각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에 너무 관심이 없다 보면 거대한 제조 업체들의 속임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무지몽매한 시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탕수수 농장 만큼 악명 높은 것이 커피 농장이다. 커피는 알다시피 고도의 노동 집약적 산업이다. 사탕수수나 팜오일처럼 드넓은 평야에서 대량으로 재배할 수 없기에, 인부들이 해발 750 미터의 고산 지역에 오르내리며 열매를 딸 수밖에 없다. 은은하고 그윽한 향기의 이면에는 저개발국 원주민과 아이들의 피땀이 있지만, 바쁜 현대인들의 모닝커피 한 잔에 그런 진실이 드러나있을 리가 없다.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가 우리를 그런 정보로부터 차단하기 때문이다.


농장의 실태와 중간 상인들이 겪는 불공정한 거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차츰 커지자, 스타벅스는 발 빠르게 자신들의 비즈니스는 윤리적(Ethical) 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농장에서 “행복하게 웃으며 일하는”인부들의 사진을 지점마다 걸어 놓기도 했다. 최근에는 아예 코스타리카 커피 농장을 대중에게 공개하기 시작했다. 묘목부터 추출까지 커피 생산의 전 과정을 누구나 관찰하고 체험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땀방울이나 고난, 헌신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은 모두 아름답고 정갈한 포장지로 가리워진다. 마케팅을 전공한 광고 디자이너가 만든 시선을 사로잡는 영상. 제품을 사고 싶어 안달나게 만드는 재치 있는 한 줄 문구.  이런 요소들이 더더욱 소비자의 구매욕을 자극한다. 우리는 범람하는 광고와 간판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서로 자기들이 제일 안전하고 쓸모있고 맛있으며 효과적이라고 외치는 광고들 틈바구니에서 이젠 어떤 새로운 것을 봐도 심드렁하기까지 하다.  


좀 더 많은 업체들이 생산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으면 좋겠다. 원산지의 노동자 처우 실태와 환경 오염도, 각 상품의 레시피, 포장 재질의 독성 테스트 결과, 실제로 들어간 마케팅 비용까지. 물론 자본주의 경제가 극에 달한 세상에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미국에서는 세제나 비누 등의 화학 제품의 본사에 소비자가 직접 이메일을 보내면, 원료들의 독성 테스트 결과 리스트를 보내주기도 한다. 소비자들이 가차없는 제품 평가 (리뷰)를 남기기 때문이다. 세제나 샴푸에 들어가는 원료와 독성 여부를 묻는 질문에 무응답으로 일관하거나 불성실하게 처신할 경우, 컨수머 리포트에서 최악의 점수를 받고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할 것을 기업도 알기 때문이다.


물론 기업들은 그리 만만하지 않아서, 특정 원료가 발암 물질이라는 것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면 그와 유사한 성분의 대체 원료를 사용하면서 Plant-based라는 문구로 소비자들을 현혹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코코넛에서 추출했다고 해서 모두 몸에 이로운 것이 아님에도, 그들은 유해한 물질인 Sodium Laurel Sulfate 에다가 Coconut-derived 라는 단어를 하나 추가함으로써 마치 자연적인 원료만 사용하는 것처럼 명시하기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기농 (Organic) 이라는 말 자체의 정의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이제 많은 소비자들이 유기농만 찾으니, FDA 에서 마음만 먹으면 유기농의 정의를 “50%이상만 유기농이면 유기농 이라고 표기할 수 있다” 라고 정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소비자들은 그런 것에 대해 잘 모르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몇 년 전에 어느 핸드백 디자이너가 자신의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체와 관련 비용을 모두 공개하고 자신은 정확하게 30%의 마진만 가져가겠다는 컨셉으로 론칭한 브랜드가 있었다. 럭셔리 브랜드의 거품을 빼고 팔겠다는 야심차고 획기적인 시도였다. 비즈니스가 잘 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검색해도 웹사이트를 다시 찾을 수 다.


지금 우리 손에 들린 매력적이고 깨끗한 완제품. 이것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걸어온 그 모든 고통과 수난과 아름답지 않은 과정들의 발자취를 제조 업체들은 감추고 싶어한다. 그런 것들을 감추고 매끈하고 근심없는 표면만을 드러내야 사람들이 좀 더 생각없이 소비할 것이기 때문이다. 편안함과 안락함에 중독된 현대인들은 자신이 방금 소비한 물건의 역사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깊이 알 필요가 없다. 그래야 더 편안하게, 무신경하게 소비하며 향락의 즐거움과 안락의 달콤함에 도취될 테니까.  


<아름다움의 구원> 의 저자 한병철은 근대 미학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아래 따옴표 안의 내용은 책 안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필자가 책 전체의 내용을 요약해서 쓴 것임을 미리 밝혀 둔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긍정성의 총화처럼 보인다. 균형잡히고 조화롭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일상에서 겪는 불균형과 부조화, 갈등과 부자유로부터 벗어난 이상적인 상태이다.  이러한 관념은 근대 미학의 산물이다.


근대 이전의 미학에서 아름다움은 언제나 부정성과 결합되어 있었다. 미는 만족이 아니라 저항과 고통이자 거룩함이요 숭고함이었다. (알이 부서지고 깨져야 생명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어미의 살을 찢는 고통이 있어야 사람이 탄생하듯이).


그러나 근대 이후로 미는 어떤 저항도 고통도 없이 만족과 쾌감을 주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미적인 것은 오직 자기 “긍정”, 자기애와 자기만족에만 기여할 뿐 주체를 흔들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것이 된다. 따라서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 문화가 세상을 장악했으며, 온라인 상에서의 피상적인 아름다움에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며 열광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예술가라 할 수 있는 제프 쿤스의 작품을 보면 우리 시대의 미의 관점을 알 수 있다. 어떤 재앙도 상처도 깨짐이나 갈라짐도 없는, 심지어 봉합선도 없는 “매끄러운” 표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다듬어지고 연마된 상태.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탈 장치들도 매끄러움의 미학을 좇는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현대의 아름다움은 두려움을 감춘다. 결점과 흠이 없고 매끄럽고 쾌적하며, 청결과 위생에 사로잡혀 있고, 쉽고 즐거운 것을 향유한다. 거기에는 상처나 고난, 죽음과 재앙, 불편함이 거세되어 있다.”


과정의 고난을 숨긴 채 매끄럽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포장된 완제품만을 손끝으로 만지며 사는 현대인. 모든 것을 자급자족 해야 했기에 집에서 왠만한 것은 다 만들던 시절과 비교할 때, 어쩌면 우리는 눈에 두터운 안대를 착용하고 시야가 가리워진 채, 손가락 끝에 만져지는 보드라운 감촉만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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