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퉁이를 돌아가면 어떤 만남이 기다릴지.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자치지방 세비야 주의 주도이자
죽거나 죽여야 끝난다는 붉은 투우와
춤사위 하나로 온몸의 열정을 발산하는 플라멩고의 본고장.
Sevilla로 가는 아침.
마드리드에서 고속철 Renfe를 타고 2시간 30분만 가면 세비야에 도착한다.
아직은 적응이 되지 않은 우루땡 곰 같은 백팩을 어깨에 이고 캐리어를 야무지게 끌고 역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진짜 스페인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 여행 시작 사흘째인데 또 설렌다.
아침 일찍 나서느라 먹지 못한 아침은 버터향 물씬 나는 뜨끈한 크로와상으로 결정.
크로와상 한 귀퉁이를 뜯으며 어김없이 오늘 아침을 기록한다. 창밖으로는 어수룩한 하늘에 붉은 방점 하나 찍으며 날이 밝아 왔고 이곳 사람들 만큼이나 유독 길게 뻗은 기차가 시원스럽게 쭉 뻗어나갔다.
누가 물은 적은 없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교통수단을 꼽으라면 단연 기차다. 비행기와의 비교에서 2-3초 멈칫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차가 제일 좋다. 예정된 시간에 출발하고 도착하며 버스처럼 흔들거리지 않으니 책을 보거나 글을 쓸 수 있다. 게다가 비행기보다 창이 넓어서 창밖의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여행 기분에 흠뻑 젖어들 수 있다. 아참, 비행기처럼 터뷸런스도 없다.(잠깐일지라도 生死를 오가는 상상을 안 해도 된다.)
그렇게 기차 예찬론을 펼치고는 글은 쓰는 시늉만 하다가 잠들었다. 원래 배 든든하고 등 따시면 잠이 솔솔 오는 거다. 너무 일찍 일어나기도 했고, 곰만 한 짐을 나르느라 피곤도 했고, 내려서 신나게 돌아다니려면 체력도 비축해야 하는 등, 잠들어도 되는 이유는 충분했다.
이른 아침 기차라 분명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기차에서 내리자 세비야의 역은 국제시장을 방불케 하는 인파로 붐볐다. 이곳의 첫인상은 예상치 못했지만 "관광객의 범람"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역을 나서니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따뜻한 햇살과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고 조용한 거리. 버스를 타고 La Banda Looftop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의 숙소는 중간중간 한식이 그리울 몇 스팟을 제외하곤 다 다국적 사람들이 머무는 호스텔 위주로 예약했다. 그중에서도 예약하면서 가장 기대가 되면서 또 걱정이 되었던 라반다로 가는 길이다.
라반다의 루프탑 사진 한 장에 매료되어 예약을 했지만 국내 여행객의 후기는 보기 힘들었다. 거의 못 봤다고 해야 맞겠다. 그 당시엔.
그냥 지나칠 뻔했다. 안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너무 굳게 닫혀 있었으므로. 벨을 눌러 예약한 투숙객이라고 하니 어느 자유 영혼이 옥상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며 "잠깐 기다려, 내려갈게!"하고 소리를 쳤다.
이윽고 그 자유 영혼은 나를 예전에 알고 지낸냥 인사를 하며 안으로 안내했다. 문 안에는 더 많은 자유 영혼들이 소파에 널브러져 있기도 하고 책을 보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기도 하고 누군가는 위층에서 뛰어 내려와 자기가 만든 요리라며 맛있는 냄새를 풍겼고, 그걸 듣고도 또 다른 자유 영혼은 내 빨랫감을 어디로 가져갔냐고 동문서답하기도 했다. 묘한 질서. 내가 아무리 동양인 답지 않게 서양인 리액션에 능숙한 뻔순이라고 해도 이 상황은 적응할 아니, 그 분위기에 젖어들 시간이 필요했다. 맹꽁이처럼 서서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며 체크인을 기다렸다.
이게 무슨 느낌일까. 아주 오래전에 봤던 뮤지컬 "김종욱 찾기"에서의 인도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분위기였다. 낯설고 어지럽지만 따뜻하고 포근한, 이내 그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은 그런 분위기. 내가 좋아하는 영국 악센트를 제대로 쓰는 스탭이 체크인이 1시부터라 아직 방을 청소 중이라며 짐을 맡겨 주겠다고 했다. 그럼 근처 카페에 가서 브런치라도 먹어야겠다 싶어 스탭에게 물었다. "네가 근처에서 가장 좋아하는 카페가 어디야?" 물었더니 완전 만족할 거라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Bar Alfalfa를 추천해줬다.
라반다 내부를 한번 휙 둘러보고는 스탭이 준 온갖 도로이름이 미로처럼 적인 세비야의 지도를 가지고 나섰다. 배는 고픈데 가는 길은 꽤 멀어 보였다. 처음엔 길 이름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건물 모퉁이마다 길 이름이 적혀있어서 그래도 어렵지 않겠다 싶었다.
골목 하나만 빠져나가니 메인 스트리트인 듯 사람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마차도 많았다. 달그닥 달그닥. 세비야에 있는 내내 길을 걸으며 들었던 소리. 몇몇 마부는 지나가며 눈을 찡긋하거나 웃으며 인사해 주기도 했다. 물론 길을 전세 낸 듯이 길 가운데로 걷는 관광객을 향해 차가운 무표정을 보이는 마부도 있었던 거 같다. 그렇지만 소수였고 원래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나의 쿨내 나는 성격대로 그런 표정쯤은 가뿐하게 잊어준다.
기억은 언제까지나 사실에 기반하기보다 나로 인해 재편집되는 것이므로.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거리 이름을 못 찾아서 깨알 같은 글씨의 지도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신사 정장을 입은 할아버지가 묻지도 않는 교회의 이름을 알려주며 가이드 역할을 해주셨다. 다행히 그분께 물어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저 멀리 스탭이 알려준 그 Bar가 보인다. 당이 떨어지고 정신이 혼미하며 손이 덜덜 떨리기 전에 도착해서 다행이다. 배가 고파 접시라도 씹어먹을 수 있을 거 같다.
길 모퉁이에 위치한 (이 발음이 맞다면) 바 알팔파는 내가 떠올렸던 그 어떤 장소보다 내 맘에 쏙 들었다. 크지 않은 내부 중앙에 비교적 큰 스탠딩 테이블이 있었고 스페인 사람들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 6-7명이 빙 둘러 서서 한 손에 맥주를 들고 축구경기를 응시하고 있다. 그 옆으로 길가가 내다 보이는 큰 창이 있고 창가엔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키 높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거기엔 외국인 중년 부부가 앉아 두런두런 얘기 중이다. 한번 쓱 둘러보니 내가 설 수 있을 자리는 작은 바 좌석뿐이었다. 일단 배가 고프니 주문하고 봐야겠다.
깡말랐지만 다부져 보이는 종업원에게 "여기는 뭐가 맛있어?"라고 물었다. 그런데, 나 배가 너무 고픈데, 종업원이 영어를 잘 못했다. 거짓말 안 하고 다 스페인어다." 뭐라 뭐라..... 뭐라앙?" 뭘 물었는데 무슨 말인지 알리가 있나. 그때 옆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눈코입 크고 얼굴 작은 남자가 구조대처럼 나타났다. 다행히 영어를 꽤 잘한다. 여기서는 타파스에 맥주 한잔이면 더 이상이 필요 없단다. 그 남자의 등장으로 막힌 혈관이 뻥 뚫리듯 대화가 순조롭게 흘러갔다. 이런 오메가 3 같은 남자.
잘 구워진 빵에 향긋한 치즈와 말린 하몽 조각이 맛깔스럽게 뿌려진 내 점심이 나왔다. 도와주고 도움받은 기념으로 서로 잔을 부딪혔다. 그 남자가 "쎄르비싸"라는 단어를 계속 썼다. (나는 어느 나라를 가나 반복되어 들리는 단어가 있으면 기어이 그 뜻을 알아내서 써먹고 만다.) 그게 뭐냐는 물음에 맥주를 쎄르비싸라고 부른다고 했다. 특히 여기 지방에서 우리로 치자면 식당 물컵 사이즈로 주문하는 맥주는 "까냐"라고 부른다고 알려줬다.
안 그래도 종업원의 까만 티셔츠에 하얗게 적인 'caña'라는 단어가 궁금했는데 실마리가 풀렸다.
그걸 알고 나니 다른 게 또 궁금했다. 도대체 저 단어 위에 물결 모양은 무슨 표시인지 물었더니 그걸 궁금해 안달 난 표정의 내가 재밌었는지 한번 크게 웃더니 '강세'같은 거라고 했다. 물결 없는 cana가 그냥 담백하게 "까냐"라면, 물결 있는 caña는 "까냐아~" 라고 "냐~아"를 좀 더 억세게 읽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단어에 강약을 넣는 거 보면 스페인 사람들도 표현하는 데 있어 남다른 기질이 있는 것 같다.
알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그제야 서로 통성명을 했다. 친절한 맥주남의 이름은 안드리안. 안드리안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중간쯤 위치한 도시가 고향이었고 지금은 스위스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은 대학 친구 중 한 명의 결혼 축하 파티 겸 해서 다 같이 세비야로 놀러 왔다가 나를 만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중앙 테이블에 시끌벅적 축구를 보고 있던 건장남들이 안드리안의 동창들이었다.
우리의 만남이 새삼 참 신기하고 재밌다며 안드리안은 살룻Salud(건배)!을 외쳤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스페인어를 배워서 다음에 올 때는 더 많은 사람과 스페인어로 소통해 보고 싶다는 내 말에 어려울 거 없다며 한 마디를 알려줬다.
우나 one 빨라브라 word,
우나 one 까냐 shot.
한 잔에 한 단어씩. 그렇게 재밌게 하나씩 배워가는 거라며, 벌써 내가 본인이 한국어 하는 거에 비해 훨씬 스페인어를 잘 하지 않냐며 농담을 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예정에 없이 길어졌고 나는 체크인 시간인 1시가 훌쩍 넘겨서야 안드리안과 작별인사를 했다.
"누가 또 알아? 여기서 우리가 말도 안 되게 만났듯이, 또 말도 안 되게 어디선가 다시 만날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설마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이..'라고 믿는척하고 안 믿었겠지만 지금은 믿는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정수리로 태양이 내려 꽂히는 한낮의 길목을 이제는 좀 더 능수능란하게 가로질러 라반다로 돌아왔다. 서둘러 체크인을 마치고 오후 시간을 보낼 곳을 찾다가 스탭이 추천한 Plaza de España(에스파냐 광장)로 나섰다. 마드리드에서 봤던 수많은 광장에 큰 감흥이 없었기에 크게 기대는 안 했다.
아직도 저 아이스크림 맛이 기억이 안 난다. 한낮이 되자 더웠고 아이스크림을 보자 로마의 휴일이 생각이 났고 더위도 식히고 기분도 내보자는 생각에 하나 샀다. 아이스크림에 관한 기억은 그냥 차가운 것이 목을 스쳤다는 정도. 막 받아 들고 손에 들고 걸었던 다섯 걸음 정도는 기분 내기 좋다. 세 걸음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찰나의 순간.
지도를 보고 요리조리 걷다 보니 뭔가 웅장한 건축물이 보이는 듯했고 그때부터는 지도를 접고 보이는 쪽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들어가는 방향으로 들어가 보니 어두컴컴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여기가 맞나 싶을 때 저 멀리 환해지는 게 느껴졌다.
몇몇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이 보였고 밖을 향해 나갔는데
나는 그만 그 풍경에 압도당했다.
내가 가진 것은 휴대폰뿐이라 그 넓은 광장이 다 담기질 않았다. 그야말로 웅장했다.
뜨거운 햇살을 다 안을듯한 기세의 넓은 광장은 중앙으로 인공운하가 흐르며 잔잔하게 흐르는 물길이 열기로 가득한 광장의 균형을 잡아주는 느낌이다. 어떻게 찍어도 보는 것만 못하니 사진으로 욕심을 채우지 않기로 한다. 왠지 어디선가 본 느낌도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 오래전에 태희 언니가 빨간 꽃을 달고 플라멩고를 신명 나게 췄던 모 핸드폰 광고의 배경이 된 장소라고 한다. 그때 그 광고가 주는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오래 전의 이미지가 아직까지 남아있다니. 아마 이미 그때부터 이 문화권의 분위기를 조금은 동경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참 멋있었다. 그 장면이.
광장 맞은편엔 푸르름이 무성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광장을 돌아다니느라 뜨거워진 열기를 식히기 위해 산책로로 들어갔다. 여전히 마차가 또각또각하며 지나다녔고 밀린 과제를 하기 위해 도서관이 아닌 공원을 찾은 듯한 학생의 모습도 보였다. 정말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이 도시는 어쩌자고 이렇게 뜨거우면서도 동시에 차분할 수 있나
아직 하이라이트가 될 플라멩고 공연을 보지도 않았는데 이미 세비아에 푹 빠져버렸다.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상상했던 스페인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실감이 났다. 원래 늘 마음에만 품고 오랜 시간 기대를 하면 실망을 하기 마련인데 여기는 오히려 기대를 넘어서니 할 말이 없다.
감사하다. 실망이 아닌 벅참이고 감동이라.
여기서는 사진을 하나 꼭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마침 지나가는 스페인 가족 무리가 보였다. 어딘가 고상함이 묻어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로 보이는 부부가 유모차를 밀며 한가로이 걷고 있었다. 부탁할까 말까 하다가 그런 내 모습이 티가 났었는지 할아버지가 눈을 맞추신다. 씽긋 웃으며 부탁드리니 기다렸다는 듯이 사진을 찍어주러 오셨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 모습과 포즈를 잡는 내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여 굉장히 흐뭇해하셨다. 할아버지는 무슨 작가정신이 발휘되셨는지 이 각도 저 각도, 가까이 또 멀리 민망할 정도로 다양하게 찍어 주셨다. 정말 큰 빚을 진듯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우리 식으로) 감사하다고 인사드렸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guapa~ guapa~ (아이고 예뻐라~)" 뒤로 돌아보면서 까지 예쁘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역시 큰 눈과 높은 코와 작은 얼굴을 가진 그들 눈에는 그에 상반대는 얼굴이... 예뻐 보이는 가 보다. 아침 일찍 준비해 오느라 머리를 못 만져서 앞머리 하나 없이 시원하게 묶어 올려 '누가 알아볼 테냐!'하는 마음으로 다녔는데, 여기가 스페인임에 다시 한번 감사. 여기서 살까 보다.
어느새 유난히 길게 보냈던 하루의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갔다.
많이 걸어 다리가 뭉치고 발바닥이 지끈거리며 얼굴에 주근깨는 햇볕에 한층 더 강하게 본색을 드러냈지만 낯선 곳에서 지는 해를 보며 노곤한 기분을 달래는 이 시간만큼은 완벽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