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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ventud Jul 07. 2016

무기력에 대한 처방, Sevilla

결국은 그 길 끝에 나와 만나 악수하는 여정이다.

데렝~ 데렝~ 데렝~


... 잠결에 귓전에 맴돈다.. 어제 루프탑(옥상)에서 보이던 대성당 종소리 인가 보다.

아침마다 귀를 두들겨 패는 듯한 시끄러운 알람 소리 와는 차원이 다른 은은한 울림.

소리가 귀로 들어와 마음을 울리고는 천천히 천천히 머리에 와 닿아 속삭이는 듯했다.  



'여기가 세비아야, 아침이란다'




시계를 보니 8시 30분. 느지막이 일어나 머리 질끈 묵고 루프탑(옥상)으로 올라갔다.

반짝 거리는 햇살이 주름진 나무 테이블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스크램블 에그를 스탭에게 부탁하고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하니 머리가 "쨍"하고 정신이 든다.

따끈한 토스트에 시리얼 한 그릇 말아먹으며 눈 앞의 전경을 멍하니 바라본다.


매일 아침을 여기서 맞이하고 싶다



"여기 앉아도 될까?"


브루스 윌리스를 닮은 외국인이 눈을 찡긋하며 내 앞으로 왔다.

서로 어디서 왔냐고 묻는데 그 남자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가 없다. 분명 유럽 어느 나라라고 이름이 스르륵 귀를 스쳤는데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왠지 본인 나라를 모른다고 하면 서운할 거 같아 아는 척하고 넘어갔다.



'... 어딜까.. 어느 나라 사람이니..?'



그리고 나는 곧 창피한 얘기를 할 예정이다. 그 남자는 '유럽 어딘가'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지금은 일 때문에 바르셀로나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내 여행에 대해 묻기에 신이 난 목소리로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이태리로 그리고 내가 정말 기대하고 있는 '크.로.아.티.아.'로 가서.. 그 다음엔... 하려는데 크로아티아를 잘 모른다. 자그레브로 들어간다고 하니 이어지는 당황스러운 한마디.



"아.. 거기가 내 나라야:)"


크로에이시아. 이제 들으니 들린다. 영어를 소름끼지게 잘하는 정도는 아니라도 먹고사는데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크로아티아를 제대로 된 영어 발음으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냥 크로아티아를 크로아티아라고 부를 거라 무심히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아, 너희 나라에서는 그렇게 부르는구나." 그제야 우리가 얘기하는 나라가 같은 나라임을 알고 한바탕 웃었다. 혹시나 나처럼 모르고 있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썼는데, 나만 모르는 거 아니죠...? 하하하..... 눈물 또르르..



유쾌하고 상쾌했던 아침식사가 끝나고 내일 론다로 갈 버스 티켓을 끊기 위해 버스 터미널로 가야 했다. 트램을 탈까 하다가 자전거 렌탈샵이 보여서 자전거를 빌려보기로 한다. 신분증과 보증금 얼마를 맡기고 자전거를 받았다. 매일 한강에서만 타던 자전거를 세비야에서 타다니. 마치 이 곳에 눌러사는 지역주민이 된 듯한 기분에 마음이 들떴다.



너는 나에게 행복감을 줬어



버스 티켓을 끊고 강변을 따라 한동안 라이딩을 했다.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반짝 거리는 햇살이 머리카락 위로 찰랑찰랑 내려와 앉는다. 1시간 여를 타니 안장이 좀 불편해서 더 오래 타지 못했지만 자전거로 아침의 세비야를 누빈 것은 다시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오늘은 세비야에서의 마지막 날이자 하이라이트가 될 플라멩고를 보는 날이다.



스페인 예술의 꽃 플라멩코                                     

플라멩코라고 불리는 무용과 음악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발달했지만, 그 기원은 멀리 인도, 아랍 또는 그레고리안 성가 등에서 전해졌다는 설이 있다. 이 플라멩코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안달루시아 지방에 15세기에 들어온 소위 집시, 스페인어로 ‘히타노’라고 불리는 존재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페인 예술의 꽃 플라멩코 (유럽 음악도시 기행, 2006. 1. 16., 시공사)



세비야에서는 플라멩고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 많다. 식사를 하면서 혹은 와인 한잔 하면서 볼 수 있는 곳도 있고 가격도 다 다르다. 그중에서도 "플라멩고 박물관"에서 하는 공연은 공연 자체도 수준급이지만 합리적인 가격에 Free drink로 샹그리아 한잔까지 제공된다. 그래서인지 플라멩고 박물관의 7시와 8시 30분 공연은 이미 매진이 되었고 5시 공연 티켓을 겨우 구할 수 있었다.


 

그늘막도 그림같은 세비야



건물 하나 하나가 예쁜 액자 같다.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펄럭이던 뮤제오 플라멩고




뜨거운 태양을 피해 들어선 공연장은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표현과 춤사위가 한눈에 들어올 것 같은 아담하고 아늑한 공간 이었다. 과일향 물씬 나는 시원한 샹그리아를 한 모음 넘기며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각국의 관광객들이 다 모였다. 비디오 촬영이 안된다는 것 외에 몇 가지 주의사항을 당부하며 공연이 시작되었다.




노래하는 빨간 꽃을 단 할머니, 기타 치는 장발 아저씨,  젖은 곱슬머리의 춤추는 남자, 우람하고 무거운 치마를 휘두르는 힘이 보통 남자는 넘어설 듯한 춤추는 여자까지 총 4명이 등장했다.



"아라~~~~ 사라~~~~~"


회한과 애환이 느껴지는 할머니의 노랫가락이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스페인이고 다른 나라 말임에도 그 감정선이나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은 우리네 민요를 듣는 듯했다. 말로 풀어낼 수 없는 가슴속 깊은 데서 얼기설기 엉겨있던 속내를 걸러내지 않고 뱉어내는 듯한 恨. 좌중을 빨아들이는 그 무게에 춤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빠져 들었다.



불특정 박자에 맞추는 박수 소리, 흡사 "얼쑤"와 같은 추임새인 "올레"가 노래 중간중간 나지막이 곁들여졌고 들을수록 너무 매력적이어서 숨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그냥 눈으로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의상을 입은 여자가 격렬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섬세하고 강렬한 손짓 그리고 표정까지. 온 무대를 꽉 채웠다.










열정이 넘쳐나 그나마도 머리에 물기가 촉촉하지 않으면 타버릴 듯한 남자의 발장단 소리는 심장을 쿵쿵 두근거리게 했다. 무대위의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오늘 공연을 끝으로 다시는 공연을 못하는 사람들 처럼, 마치 마지막 공연인 것처럼 온 에너지를 다 쏟아 내는 듯 했다. 열정, 힘, 음악 삼박자가 빈틈없이 뜨개실처럼 촘촘하게 떠진 멋진 공연이었다.



만약 이 공연을 한마디로 요약해야 한다면 어떤 표현이 좋을까.








누군가 약도 없는 무기력으로 좌절하고 있을 때 처방받으면 더 없이 좋을 공연






이 정도면 표현이 될까.



지난 시간이 아쉽지 않은, 하루 더 늙음에 다가갔다 해도 조금도 억울하지 않을 하루가 저물어 간다. 따끈한 커피 한잔 하며 오늘 하루를 정리하고자 대성당이 보이는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렌지 맛이 나는 카푸치노 한잔과 애플파이 하나를 주문하고 오늘 찍은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다.



상큼한 커피와 달달한 애플파이의 조합



마침 해가 저물며 노을이 하늘을 예쁘게 물들였다. 자리에 앉은 채로 그 풍경을 핸드폰으로 찍다가 왠지 더 욕심이 생겨 바로 옆 도로변으로 가서 무릎을 굽히고 작가도 울고 갈 자세로 노을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던 외국인 중년부부와 눈이 마주쳤다.






"It's beautiful!(겁나 이쁘죠, 이건 사진에 남겨야 돼요)"




그 말에 방긋 웃으시더니 혼자 왔으면 같이 와 합석하자고 하신다. 예의상 하시는 말씀인 거 같아 괜찮다며 두 분이서 오붓하게 보내시라고 하니 본인들은 여행 중에 젊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며 나만 괜찮으면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으시다고 하셨다.



Why not! 나야말로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환영이다.



시간을 붙잡고 싶은 순간,



40대 후반쯤 돼 보이는 부부는 독일에서 온 인상 좋은 다니엘 아저씨 , 벨 아주머니였다. 서로를 소개하며 이름을 얘기하는데 내 영어 이름을 듣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하하 웃는다. 어리둥절 하는 나에게 "우리 딸 이름이랑 똑같네! 어떻게 이런 우연이!" 하며 잃어버린 딸이라도 찾은 표정을 하며 반가워하신다. 이름 덕인지 그때부터인가 왠지 서로에게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다니엘 "어떻게 여기 세비야까지 오게 된 거야?"


나 "저는 대학생 때부터 스페인에 너무너무 오고 싶었는데, 그때는 돈이 없었어요. 엄마 아빠한테 여행 간다고 목돈을 부탁하기도 죄송해서 달리 방법이 없었죠.(당시 카페 알바 시급 2500-3000원) 방학이 끝날 때마다 배낭여행을 다녀왔다는 친구 얘길 듣고 너무 오고 싶었지만 스스로 올 수 있는 능력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요. 졸업 후에 드디어 일을 시작했고 늘 마음 한편에 스페인을 품고 있었어요, 힘들 때마다 올 날을 생각하며 힘을 내기도 했고요. 그리고 서른이 되는 해 결심했어요, 휴가로는 여기를 다녀올 수 없으니 일을 그만두고서라도 가야겠다. 더 나이 들고 모든 조건이 다 만들어진 후가 아니라, 지금의 탄탄한 피부와 쉽게 지치지 않는 체력과 푸릇푸릇한 마음가짐일 때 가야겠다. 고민 끝에 회사에 얘기했고, 생각지 못하게 무급 휴가를 받아서 결국.. 오게 됐어요. 그래서 저 사실 너무 벅차요, 그리고 이 순간에 두 분을 만나서 너무 좋아요."




다니엘 "우리는 여행 중에 너처럼 혼자 여행 온 젊은 사람들을 보면 참 보기 좋아. 그래서 너와 얘기해 보고 싶기도 했고. 모든 사람이 생각은 해. 하고 싶다, 가고 싶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만 하고 말만 한다는 거야. 그건 아무 의미가 없어. 용기 내서 이렇게 자기가 원하는 걸 이루어내는 건 정말 멋진 일이야. 잘했어. 정말 대견하다."



대견하다는 다니엘의 말에 지구 반대편에 와서 서양인 아빠를 만난 느낌이었다. 나는 다짜고짜 한국에서 아빠와 찍은 사진을 다니엘과 벨에게 보여줬고 다니엘은 내 영어 이름과 같은 이름이라는 딸의 사진을 보여줬다. 이제는 내가 궁금한 걸 물어볼 차례였다.



나 "두 분이 같이 여행 다니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요. 두 분은 어떻게 만난 거예요? 첫눈에 반한 거예요?"


벨 "다니엘은 그런 거 같은데.. 나는 그렇지 않아. 처음에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봤는데 무뚝뚝하니 나한테 별 관심도 없어 보이고 말 수도 적고 별 생각이 없었어. 이렇게 결혼하게 될 줄은 그땐 몰랐지. 어느 날 우리 집에서 친구들을 초대해서 작은 파티를 했는데 다니엘이 온 거야. 아니 그렇게 무뚝뚝한 남자가 세상에 꽃을 가지고 왔어. 그리고는 그 꽃을 나한테 주더라고."



그게 그 두 사람의 시작이었다. 표현 하나. 말로 사근사근 표현 못했던 그가 건넨 수줍은 마음 한송이.



그 시절의 얘기를 하며 서로 '흥, 그때 그랬잖아.. 뭐가 아니야' 하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행복해 보였다. 너무 좋아 보인다며 이렇게 잘 맞는 사람을 만난다면 결혼생활이 너무 행복할 거 같다는 내 말에 벨이 손을 흔들며 얘기했다.


벨 "결혼은 연애처럼 혹은 동화처럼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아니야. 결혼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자 '인정'이란다. 우리는 7년을 만났지만 나는 다니엘이 주말마다 그렇게 시끄러운 음악 듣는 걸 좋아하는지 몰랐어. "


다니엘 "나도 당신이 그렇게 전화를 오래 붙잡고 있는지 몰랐어. 금방 만날 친구랑 그렇게 오래 통화하는 줄 누가 알았겠어. 아무리 오래 만나도 모르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지"


벨 "다니엘 말이 맞아. 내가 전화로 떠들 때는 다니엘이 불편할 테고 다니엘이 듣는 음악을 내가 싫어할 수도 있어. 그럴 땐 내가 그게 싫으니 하지 말라고 얘기할 것이 아니라 내가 자리를 피해 줘야 해. 다니엘은 나랑 살기 전까지 20여 년을 넘게 그렇게 살아왔어. 그런데 내가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을 바꾸려고 하면 그 관계는 힘들어져. 서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존중해 줘야 해. 결혼하기 전의 다니엘도 결혼 후의 다니엘도 여전히 같은 사람이니까."




나 "그래도 그게 쉬우면 부부나 연인이 다툴일이 없겠지만, 싫은걸 계속 참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다니엘 "맞아, 어려운 일이야. 예를 들어 우리는 이렇게 했어. 벨이 전화가 길어진다 싶으면 나는 우리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고, 내가 주말에 음악을 들을 때는 벨은 장을 보러 가며 내 공간을 확보해줬지. 정말 존중한다는 건 서로의 시간을 허락해 주는 거야. 그래야 오래 같이 인생을 걸어갈 수 있는 거 같아."



벨 "우리 결혼식에서 우리 결혼의 증인이 되어준 두 사람이 있는데 그들도 결혼을 했어. 그런데 3년 전에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최근에 그 아내를 만나서 이런저런 얘길 했는데 그 사람이 울면서 그러는 거야. 내가 그에게 하지 말라고 했던 것들이 후회된다고. 그 사람을 바꾸려고 했던 내 모습이 후회가 된다고."


문득 지난날이 떠올랐다



이 얘기를 들으며 내내 생각나는 한 사람이 나도 있었다. 생각이 안 난다면 좋았을 걸. 생각이 난다는 건 나 역시 그 못난 행동을 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나 "제가 두 분을 조금 일찍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생각해보니 그러지 못했어요. 그랬다면 당시에 진심으로 아꼈지만 그 마음만큼 표현하지 못했던 그 사람에게 좀 더 좋은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시무룩한 내 표정에 무슨 걱정이냐는 표정으로 다니엘이 말했다.


다니엘 "너는 이제 시작인걸!"


벨 "남자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해야 돼, 이건 남녀 관계뿐만이 아니라 가족, 친구, 남자친구, 남편 모두에게 해당되는 거야. 말하지 않은 마음까지 알아줄 거라고 기대하면 안 돼. 표현해야 돼. 속상한 마음,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 사랑하는 마음도."






 "Best decision in my life"



다니엘이 벨과의 결혼에 대해 표현한 한 마디. "그녀와의 결혼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어"



처음에는 분명 서로의 개성대로 모나 있던 모습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이제는 톱니바퀴처럼 서로에게 딱딱 맞아 들어가는

그 모습이 세비야에서 본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서로의 메신저를 나누고 다음에 사랑하는 사람과 독일에 오면 집으로 놀러 오라며 내 수첩에 주소까지 적어주셨다. 시간은 12시가 가까워 왔고,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 깜깜해진 골목길을 기억을 더듬어 호스텔로 혼자 돌아가야 하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꼭 예정돼 있었던 운명처럼, 영화처럼 뜻깊고 의미 있었다.




반짝이는 세비야의 마지막 밤




다시금 깨달았지만

여행은 새로운 곳을 보는 것 만이 아니다.

새로운 람과의 만남을 통해 익숙해진 내 우주를 벗어나, 결국 그 길 끝에 나와 만나 악수하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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