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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바 Aug 06. 2023

경비아저씨께 편지를 받았다


늦은 밤 퇴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파트 정문을 지나 경비실을 향해 인사를 하곤 하던 전화를 마저 하기 위해 집 옆 정자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어둑한 풍경 사이로 한 경비 아저씨가 다가와 종이 한 장을 내미셨다. 너무 시끄러웠나? 늦은 밤 수상해 보였나? 생각하려던 찰나 “아직 안 들어간 것 같길래..” 라며.

 

얼핏 봐도 경고장은 아닌 비주얼에 안심하며 스윽 보니, 종이 가득 손글씨가 보였다.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헉.. 감사해요!” 말씀드리니 “내가 더 고맙지요!” 라며 한 손을 흔들곤 사라지셨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일까 궁금하고 의아한 마음에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 코 끝이 찡해지고 말았다. 경고장도, 수상한 이야기도 아닌 편지였기 때문이다.


<편지 내용>

그 언제부터 ~

시간은 정확하지 않아도

경비실 향해 꾸벅 인사하는 아가씨

나는요 A조 경비

B조 근무 때도 인사는 꾸벅하겠지요

참으로 고맙고 착한 아가씨임 틀림없는 것 같네요

내일은 비번

근무하는날 이 시간쯤 나는요 유리문 밖을 보게 된다.

요즘같은 세상에 인사성도 밝고

예쁘기도 하여라

그럼 모레 근무때 이 시간쯤 나는 문 밖을 보게 되겠지.

단발머리 아가씨께 행운을

-4동 경비아저씨-


생각지도 못한 편지에 안구건조증이 단숨에 치료된 느낌이었다. 편지지를 뒤집어보니 주차협조문이었다. 주차협조문이 편지지가 될 수 있구나... 경비 아저씨의 마음과 걸음을 상상하니 감동이 더 커졌다. 편지 속 주욱 그어 그 위에 고쳐 쓰신 것도. 전하고 싶은 마음에 더 적합한 단어를 고르고 골랐을 찰나의 고민도. 그렇게 주차협조 대신 감사를 빼곡히 채워 건네주러 오신 걸음까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내 인생 이런 편지는 처음이다.


놀라움 뒤에 약간의 슬픔 혹은 뜨끈한 것들이 밀려왔다. 어렸을 때부터 이 아파트에서 살았던 나는 인사하는 게 오랜 습관이었다. '인사해야지!'하고 마음먹고 하는,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는 뜻이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딱히 대단할 것 없는 인사였을 뿐인데. 누군가의 밤을 비춰주는 근사한 일이 되었음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근무 날 밤마다 유리문 밖으로 시선을 던질, 누군가의 고독한 밤을 상상해 보게 되었다.


집으로 들어가 나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요란스레 자랑했다. 부모님은 덩달아 감동받으시며 편지를 읽고 또 읽으시곤 경비실에 비타오백 한 박스를 건네셨다. 단발머리 아가씨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내가 신신당부했다...) 친구들을 만났을 때도 자랑했다. 친구들은 편지를 읽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우린 경비아저씨의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편지를 받은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지극히 평범한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온다.


생각해 보니 그날 밤 나는 회사에서 제대로 털리고 난 후 전화로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는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편지 덕분에 '난 경비 아저씨한테 이런 편지도 받았어! 이거면 됐어!' 하는 생각이 들면서 힘이 생겼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고, 외로운 건 당연하다지만 다정함의 힘을 믿는다. 나에겐 평범했던 아주 작디작은 무언가가, 행운을 비는 편지가 되어 돌아오기도 하니까. 살벌한 예고보다는 예고 없는 따스함이 세상 더 많이 생겨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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