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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Jun 13. 2023

조조, 와타나베, 그리고

1.

     몇 주 전 남편과 먹태에 생맥주 한 잔을 하러 동네에 새로 생긴 맥줏집에 간 일이 있다. 우리 부부의 공통된 취미는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데, 그날도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된 대화 화제는 우리의 아기인 진우, 남편의 요즘 회사가 어떤 모양새로 돌아가는지, 직장 동료들과 나눴던 작은 대화들, 나의 학교 생활의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 몇몇 가지, 곧 있을 이사에 대한 것 정도이다. 평소처럼 이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문득 내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 뭔지 물었다. 남편은 한참 고민을 하더니 ‘삼국지’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나는 삼국지를 읽지 않아서 삼국지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도 남편이 신나게 삼국지 줄거리를 이야기하길래 즐겁게 듣는 척했다. 듣는 와중에 조금 매력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남편은 삼국지에 나오는 여러 등장인물 중에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조조’라고 했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남편은 조조라는 인물은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거나 관습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실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낮추기도 하는 인물이고, ‘간웅(간사한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한 간사함이 자신에게는 정의로운 것이라고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조라는 인물이 자신이 현재 삶에서 추구하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덧붙였다.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남편이라는 사람을 스물하나의 나이부터 알기 시작해서 스물셋부터 사귀기 시작했으며 결혼 생활을 해낸 시간이 벌써 5년 차인데, 이 사람의 가치관 비슷한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와 진우에게 이렇게나 아무 계산 없이 대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신에게 지키고 싶은 제일 큰 존재라서구나라는 조금 담백하고 고마운 깨달음을 얻었다.      


2.

     얼마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재독 했다. 명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고등학교 1학년 정도에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 같다. 열일곱의 나에게 하루키의 소설을 속된 말로 충격과 공포였다. 어린 나에게는 (비록 소설이지만) 이런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 같은 청춘이라는 시기가 이렇게 아프다는 것이 너무 놀라웠고 또 무서웠다. 그런데, 서른 하나가 된 내가 이 소설을 다시 읽으니 조금 우습고 유치하다고 느끼는 부분들이 생겨있었다. 그런데 하나 더 깨달은 바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와타나베’의 대사와 서술에서 너무나도 많은 나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책 끄트머리를 접어 갈피를 해놓은 몇 구절을 가져와본다.     


      “나하고 와타나베는 닮은 구석이 있어. 와타나베와 나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 있는 인간이야. 오만하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야 있겠지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거기에 대한 것 말고는 어디에도 관심이 없어. 그래서 자신과 타인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어.” -409p.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뿐이야. 그러다가는 결국 실망할 뿐이니까.” -111p.     


      “괜찮아. 아마도 여러 가지 감정을 좀 더 바깥으로 표출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너도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감정을 터뜨리고 싶으면 나에게 하면 돼. 그러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나를 이해해서 어쩌려고?”

      “넌 정말 모르는구나.” 내가 말했다. “뭘 어쩌겠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야, 이건. 세상에는 열차 시간표를 조사하는 게 좋아서 하루 종일 열차 시간표만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어. 또는 성냥개비를 연결해서 길이 1미터나 되는 배를 만들려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이 세상에 너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잖아?” -284p-285p.     


      소설 속 와타나베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큰 동요가 없고, 여러 상황과 사람을 잘 수용한다.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나오코의 내면적 어려움도, 미도리의 선 없음도, 같은 방 특공대의 예민함도, 나가사와의 오만함도. 그러나 이런 와타나베도 자신의 삶에서 처음 사랑했던 나오코를 자신의 잣대로 판단했고 이에 나오코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이런 와타나베의 사람과 삶에 대한 적당한 무심함, 거기에서 나오는 그 수많은 것들이 무엇이든지 다 괜찮다는 태도를 내가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내 삶에서 이러한 태도 일부 지니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 그런 내 모습을 꽤나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애석하게도 와타나베가 자신과 상대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소중한 것을 놓친 그 모습마저 내가 여태까지 잊지 못하는 내 인생의 상실의 순간과 비슷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3.

     누군가의 인생에서 좋은 기억, 혹은 강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 누군가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바, 혹은 그의 삶의 모양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나는 '나'라는 사람이 지금의 모양으로 형성되기까지에 꽤 많은 영향을 미쳤던 책들이 떠올랐다. 어떤 사람을 알고 싶다면 그의 책장을 들여다보라는 말도 있다. 책을 읽고 사유하는 시간들이 모여 우리의 내면의식의 밑바탕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많은, 다양한 책을 읽으며 더 많이 사유해야 할 것이다. '나' 혹은 타인에 대해 깊이 있게 알고 싶다면, 마음속 깊이 남아있는 책은 어떤 책이냐고, 어떤 등장인물이냐고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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