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다이어리를 만들고 싶었을까?
심각한 방향치, 길치다.
사람들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숫자가 나오면 다소 멍청해진다.
그런데 오지랖은 또 넓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나에 대해 설명할 네 문장이다. 이런 나의 특징을 좀 알아줬으면, 혹은 배려해줬으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약속장소에 늦으면 내가 헤매느라 늦는거지 만남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거나 굼떠서가 아니었음을 이해받고 싶다. 거의 언제나 나이스한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하지 않는다고, 당신을 무시하거나 생까려는게 아니고 순수하게 정말 기억을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나의 나이스함을 의심하지 않기를...지난 번 그 만남이 어마어마하게 인상적이었대도, 나는 잊을 만한 다른 일이 있었던 거다. 잊으려고 작정하지 않았다. 그저 대체로 정신없는 나날들과 어김없이 피곤한 심신으로 인해 그 만남을 잊었을 것이고, 당신이 일깨워주면 기억해내려고 애쓰면서 반색하는, 결국은 나이스하고야 마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게 이유가 될까? 숫자 앞에서는 멍~~해지는 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관리하는 통장이 무려 세 개가 되어 있다. 우리 집 통장, 도서관 통장, 출판사 통장...숫자에 약하고 돈 계산에 취약한 내가 통장을 세 개나 관리한다는 사실은 내가 나 스스로를 가장 안타까워 하는 부분이다. 내가 참 불쌍하다. 어쩌려고 그 부담을...넉넉하지도 않은 세 개의 살림을 돌려막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은데...또 그걸 하고 앉아 있다. 엑셀 프로그램과 은행 전산 시스템이 그걸 가능하게 하는 중이다. 경리나라 같은 어플을 사용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받지만...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나는 홈텍스도 겨우 적응한 인간인데 뭘 또 깔고 배우라고? 그 낯선 시스템에 숫자들을 입력하는 짓을 오랜 시간 적응할 때까지 하며 버텨내라고?
왜 이러는가...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단 말인가. ㅜ..ㅠ
이런 나에게 위로가 되고 '할 수 있다'는 자존감을 다잡아주는 유일한 도구가 있으니...그게 바로 다이어리다. 요즘 누가 다이어리를 쓰냐고, 핸드폰이 제일 편하다고들 하는데...핸드폰은 알람 기능을 위해 사용하고, 다이어리는 내가 내 일상을 이끌기 위한 목적으로 쓴다.
엄마, 도서관장, 편집장, 친한 동생, 동네 언니, 제일 가까운 선후배 등등의 복잡한 내 역할을 다하자면 내 안에서 정리가 필요하거든...그걸 핸드폰에 저장해뒀다 계속 알람을 울리게 하면 난 하루종일 알람에 시달려서 정신쇠약에 걸리고 말거라.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라기 보다 실은 책상 앞에 앉아 차분히 내 하루를 계획하는 시간이 좋아서 쓰기 시작했다.
누가 곁에 있더라도, 심지어 여럿이 모인 회의장소에서라도 다이어리를 펼치고 손에 볼펜을 쥔 채 일정을 적는 그 순간은 나 혼자 내가 할 일을 정리하는 완벽한 순간이 된다. 되더라! 나는 그게 되더라. 그래서 내가 쓰는 다이어리를 내가 직접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이게 만만치 않은 작업임을 알고 있었다. 달력 안에 들어가는 콘텐츠들을 수집하는 것도, 해마다 연말이면 인쇄 제본소에서 달력과 다이어리 주문이 폭증하면서 제작비 단가가 수직상승을 하니 제작사양을 정하는 것부터가 난관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문구시장 시즌상품은 경쟁이 무척 치열하다.
자본은 없고 경쟁은 치열한 시즌상품인 '다이어리'를 1인 출판사 주제에 무턱대고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탁상달력부터 시작했다.
2021년에 '보고 싶어서' 라는 제목으로 따뜻한 수채화 고양이 일러스트를 넣은 탁상달력 펀딩을 열어 성공했다. 페미니즘 교육연구소 <연지원>이 제공해주는 일러스트와 2019년에 출간하고 2022년에 2쇄를 찍은 [여성을 위한 별자리 심리학]의 별자리 정보를 활용해 탁상달력을 200개 넘게 만들어 잘 팔았다.
2022년에는 이프북스 출판사에서 출간한 도서들의 이미지와 도서 정보만으로 꾸민 [여성을 위한 탁상달력]을 제작했다. 모두 여성 아티스트들의 작품이었기에 가능한 제작 취지였다. 이렇게 제작한 탁상달력은 달력에 사용된 작품의 각 작가들에게도 보냈다. 모두 반가워해서 뿌듯한 작업이었다.
2023년도에 만든 달력수첩은 코로나 2차 감염으로 자가격리하는 동안에 인쇄 제본소 알아보느라 전전긍긍하면서 만들었던 실험적 작품이었다. 탁상달력도 되고 수첩도 되는 제본형식을 기획했는데, 바로 책 날개를 활용해 앞 표지만 책 날개를 달아 책상에 세워둘 수 있게 제작한 것이다. 어떤 이는 아이디어가 너무 좋다고 좋아했고 어떤 이들은 낯설정도로 새로워서 별로 탐탁치 않아 했다. 사실 나에게 다이어리 1호는 이 달력수첩이다. 탁상달력에서 다이어리로 넘어가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드디어 들고다니면서 기록할 수 있는 형태의 달력을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2023년에 드디어 2024년에 사용할 수 있는 다이어리, 내 마음을 아카이빙할 수 있는 [마음 다이어리]를 출시한다. 페미니스트저널 이프의 박미라 초대 편집장이 운영하는 <치유 글쓰기 연구소>에서 제공한 콘텐츠로 다이어리를 제작하게 된 것이다.
캘린더와 달력수첩으로 3년간 모아둔 여성인권 관련 기념일 정보에 '마음 글쓰기' 콘텐츠로 다이어리를 구성했다.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이 얼마나 어려운 미션인가? 부담스러울 수 있어서 접근하기 쉽게 '키워드'로 글쓰기를 유도하는 구성이다. monthly(월력) + daily(일력)의 평범한 달력구성에 매주 일요일마다 메모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겼고 특히 daily(일력)에는 [일] [마음] [키워드]로 하루의 기록을 남기게 디자인되었다.
그렇게 매일 기록된 내 일과 마음, 키워드는 매 달 한 번 더 정리할 수 있고, 연말이 되면 매 달 정리한 그 마음과 키워드를 1년 짜리 기록으로 만들 수 있는 공간이 펼쳐진다.
간편하지만 제법 야무지게 1년치 내 마음을 한 권의 다이어리에 아카이빙할 수 있도록...
활짝 펼쳐지는 사철반양장 제본이고, 매직 패브릭지로 감싸진 친환경적인 표지이다. 여러모로 가볍고 필기에 적합한 제작사양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결정했다.
내 마음을 다해 만들고 있는 중이고, 큰 이변이 없는 한 2025년에는 업그레이드 된 형태로 또 제작할 계획이다. 이게 이프북스의 주력 출간물 중 하나가 되길 바라는 중이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 라는 페미니즘의 모토대로라면...가장 사적인 이 기록이 제법 정치적인 의미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해보지 않고 어찌 결과를 알 수 있나! 나 일단 해보는 쪽으로 가고 있다!
https://tumblbug.com/ifbooks2024
유튭 영상도 만들어 홍보중이다. 여성인권 관련 기념일은 기본 옵션이라는 점을 영상에 추가했다!
https://youtu.be/dMgf2S8peQ4?si=_L7PdXfCQoEDi53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