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와 함께 일주일 3편
여행에서 '먹는 시간'은 정말 행복합니다.
나이가 들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차분해지잖아요. 새로울 것 없고, 특별한 재미를 찾지 못한 채 모두가 일상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으니까요. 살면서 알게 된 것과 겪어내야만 하는 가혹한 진실들 사이에서 기쁨의 탄성보다는 애환의 곡소리를 내는 일이 많으니까요. 무언가를 열망하고 갈망하며 흥분에 찬 탄성을 내지르는 일이 점점 줄어들게 됐던 것 같아요.
먹는 것도 그렇죠. 회사 식당의 반복되는 메뉴와 별다를 것 없는 회사 밖의 음식들. 먹는 즐거움을 박탈당한 것만 같은 점심시간. 오전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분노를 뱉어내며,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왠지 모르게 우울감에 빠져야 했던 날들.
그런 '새로울 것 없이 우울한 때'로부터 '경이로움이 넘치는 살아있는 때'로 이끄는 것이 여행이며, '먹는 시간'이 그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걸 매번 여행에서 느끼고 있어요. (먹는 걸 좋아해서 그런가)
여행이 끝나갈 즈음 하는 우리의 단골 질문. 이 질문에 답하며 저는 이번 편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답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 가게 있어?
다음에 온다면 또 가고 싶을 정도로?
오랜 전통을 가진 러시아식 팬케이크 전문점
전 항상 이 질문에 '술집' 또는 '밥집'을 선택했었는데, 이번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의 답은 좀 달랐습니다. 이 질문을 받는 순간 떠오른 건 다름 아닌 디저트 가게였거든요. 너무 단 음식을 좋아하지도 않고, 빵을 즐기지 않는 식성 때문에 늘 디저트는 뒷전이었는데 말이에요.
호텔 조식을 거르고, 하루를 시작해 처음으로 들어간 곳. 가게 안에 은은하게 퍼져있는 커피 향과 빵 굽는 냄새가 블랙퍼스트를 즐기기 딱이란 생각이 들게 했어요. (유럽식 아침을 즐긴다는 생각에 좀 허세가 생긴 것도 같아요 낄낄)
카운터로 가서 메뉴판을 받아 왔고요. 열어보니 정말 다양한 종류의 팬케이크 이름이 펼쳐졌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팬케이크는 플레인 팬케이크에 연유가 함께 나오는 '연유 팬케이크'와 '바나나 초콜릿 팬케이크'였습니다.
사실 구운 사과 팬케이크를 먹고 싶었는데, 품절 상태였답니다.
러시아식 팬케이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크레페와 생긴 모양과 맛이 거의 흡사합니다. 전 크레페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어떤 가게에서 먹었는데 맛이 정말 없었거든요.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를 정도로) 기대하지 않고 먹기 시작했는데요.
제가 먹었던 크레페보다 훨씬 담백하고, 찰진 식감이었습니다. 특히 연유 팬케이크의 경우는 크게 달지 않고, 플레인 팬케이크에 달달함을 약간 가미한 맛이라 가벼운 아침식사로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초코 바나나는 우리가 알던 단맛이어서 몇 번 손이 가고 그다음은 먹어야 한다는 의지로 먹었고요. (맛은 있었으나 좀 질리는 맛이라는 얘기). 연유 팬케이크는 세상 담백해서 혼자서 하나 다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상대적으로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제게는 취향저격 디저트였습니다. 팬케이크에 대한 새로운 미각을 일깨워 준 게 '우흐 뜨 블린'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 혹시 테이블이 비워져있는데 나무로 만든 번호표가 올려져 있다면 자리가 있는거랍니다. 저흰 모르고 앉았다가 연신 사과해야했거든요. 자리 잡을 때 참고하세요!
굼 옛 마당에서 발견한 에끌레어 맛집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꼭 먹어야 할 디저트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에끌레어'인데요. 막연하게 에끌레어를 맛봐야지 라고 생각했지 특별히 찾아보진 않았어요. 역시 디저트에 무관심. ^^
굼 옛 마당에 갔던 날 영롱한 에끌레어가 진열된 걸 보고 가봐야겠다 생각했죠. 좀 늦게 방문하면 맛없는 에끌레어만 남아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1시쯤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한국 포털사이트에서는 이곳을 퍼스트시티라고 부르던데, 이 가게명을 구글 번역하면 Flash, 플래시로 번역되더라고요.)
총 3가지 에끌레어를 먹었는데요. 저의 원픽은 레몬! 2위 나폴레옹, 3위 커피였어요. 커피는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아 남겼고요.
레몬을 먹어보니, 과일이 들어간 에끌레어는 평균 이상할 것 같았고요. 시지 않고, 아주 상큼한 레몬의 풍미를 잘 살렸더라고요. 나폴레옹은 미셀 베이커리의 나폴레옹 케이크가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가보진 못해서 시켜봤어요. 아마 그 케이크와는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만, 버터크림을 넣은 에끌레어인데 느끼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알던 크림 맛과는 달라서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 여기서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커피를 좋아하는 저와 제 동행은 커피양이 디저트와 함께 하기엔 적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메뉴판을 봤더니 큰 사이즈의 커피가 있었습니다. 주문하실 때 참고하세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신 최고의 커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신 첫 커피는 '해적 커피'였는데요. 첫인상이 별로 좋지 못했죠. 이 나라에서 커피에 대한 기대를 버리자고 했던 저와 제 동행은 최고의 커피집을 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르바트 거리 와인랩 맞은편 2층에 위치한 'Con tempo'인데요.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1층 계단을 보고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특별히 찾아본 건 아니었지만, 무엇 때문인지 커피가 아주 맛있을 것 같았죠.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할 겸 이곳에 들렀습니다. 들어서는 순간 휴식을 취하기엔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광객들로 붐비지 않았으며, 넓은 공간에 적은 테이블을 배치해 고객이 편하게 커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뒀더라고요.
주문하러 카운터에 가니, 태블릿 PC를 통해 영어메뉴판을 보여줬습니다. 카운터 옆에선 오픈 키친으로 디저트를 만들고 있었어요. 친절하다기 보단 수줍음과 영어에 대한 긴장감을 가진 직원이 주문을 도와줬습니다.
보통 카페에 200ml 단위로 커피를 파는데, 여긴 더블 아메리카노가 있어서 20 루블만 더 내면 400ml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었어요. 원래 전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지만, 이날은 너무 추워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거든요.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장점은 커피 향을 맡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고소한 향으로 시작해 쌉싸름하게 끝나는 맛. 맛있는 커피를 마실 때의 그 기분!! 기대를 버리고 있어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아니에요. 커피가 정말 맛있었어요. 다른 음료보다는 커피 종류를 드시는 걸 추천해요.
우리 둘은 마주 보고 앉아 러시아에서 이런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에 감격했답니다.
또 방문했던 디저트 가게가 있었는데, 맛집은 개인 취향이잖아요. 그곳의 디저트는 거의 한입 먹고 넘길 정도로 만족스럽지 않아서 소개해드릴 수가 없었어요. 아마 제가 맛있게 먹었던 가게들도 누군가의 입맛엔 맞지 않을 테니까요. 여행에선 이런저런 일을 겪으니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다음 편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해보고 싶은 경험을 공유하도록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