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하나씩 해보면 되지!”
목요일 오후 여섯 시 삼십 분.
지하철역으로 밀려오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 혼자 반대로 걸어갈 때의 기분이 원래 이런 건가. 홀로 역행하는 기분. 혼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기분. 어딘가 부끄럽고 비참해지기까지 하는, 자격지심에 발하는 기분. 그 길을 함께 해주거나 함께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더 서글픈 기분.
그 밤, 집으로 돌아가 창문을 활짝 열고 밤공기가 가득 들어앉은 방안에 엄마와 나란히 누웠다. 한참을 벽만 보고 있다가 엄마한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엄마, 6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느꼈던 감정 중에 어떤 감정이 가장 힘들었어?”
꽤나 진지한 말투로 물었던 터라 질문에 약간의 기대감이 묻어있었다.
“엄마가 요즘 하루하루가 정신이 없는데 그런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겠니?”
나보다 보름 늦게 퇴사했던 엄마는 얼마 전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다. 바쁜 게 당연했다.
(나한테는 아니지만) 엄마한테는 아주 쓸데없을지 모를 질문을 나는 참 자주 건넨다. 그런 류의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스스로에게 답해보는 과정이 좋다. 엄마는 그런 나를 가끔 (사실은 꽤 자주) 귀찮아하신다. 그래도, 질문을 받는 날이면 엄마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캐치하곤 이렇게 말하신다.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에 방이나 치워!”
혹은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누가 뭐라고 해?”
그런데 그 밤은 조금 달랐다.
보기에 없는 대화로 주제가 바뀌었다.
“딸링 너는 무슨 일을 하고 싶어?”
‘너는 하고 싶은 게 도대체 뭐야?’와 같은 ‘딱 떨어지는 답’을 원하는 부담스러운 질문이 아닌 ‘생각’을 듣고 싶어 하는 질문. 답을 도출해나가는 과정을 궁금해하는 물음표를 오랜만에 받아보았다. 당황스러움과 반가움이 뒤엉켰다.
“음, 퇴사할 때는 하고 싶은 일이 무지 많았거든? 그런데... 지금은 하고 싶은 일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스스로에게 조금은 무책임할 법한 말을 쉽게 뱉었다.
“어머 그래? 우리 딸이 하고 싶은 일이 그렇게 많았어? 그럼 하나씩 해보면 되지!”
그런 말에 책임감을 심어주는 말을 들었다.
“세상에 직업이 2만 개가 넘는다잖아. 뭐가 걱정이니? 엄마는 이제 안 되지만 너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천천히 해봐.”
그렇게 스치듯 주고받은 대화에서 단순하고 명쾌한 답을 얻었다.
‘그래, 천천히 해나가면 잘 될 거야’라는 자기확신과 나의 속도는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나의 기준에 따라 조절해나가야 한다는 답을.
힘내라는 단 두 글자만으로 힘이 솟아오르는 순간도 있지만 그 두 글자로는 전혀 힘이 나지 않는 순간들도 있다. 초라한 날에는 힘내라는 응원에 어깨가 더욱 처지기도 하고 땅이 꺼질듯한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순간에도 힘을 내야만 하는 거야?'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과 함께.
몇 년 전 누군가에게 “뭐라도 돼서 뭐라도 해 먹고 살 거니까, 너무 걱정 말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별말 아닌 듯한 이 말은 지난 몇 년간 큰 힘이 되어주었다. 이처럼 때로는 스치듯 마주한 진심 어린 말이 '슈퍼파월'을 충전해주곤 한다.
그 밤, 내가 신뢰하고 신뢰 받고 싶은 사람으로부터 들은 '천천히' '하나씩'이라는 단어가 가져다준 급속충전에 서글픈 초라함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