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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e Jan 05. 2019

내가 아프면 엄마는 늘 미안하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병원인데요, 피검사 결과 갑상선기능저하증 맞으시네요. 약 처방받으러 오세요.”


이십 대의 끝을 단 5일 남겨두고 갑상선기능저하증 진단을 받았다. 전날 받았던 초음파 검사에서는 시커멓게 변한 내 갑상선을 두 눈으로 확인했고 염증이 만성화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최근 며칠 내 목을 유심히 살펴보던 엄마가 갑상선이 부은 거 같다며 병원에 가자고 말했다. “엄마, 내 목이 원래 두꺼운 거야.” 간호조무사인 엄마는 나도 제대로 본 적 없는 내 목을 매일 살폈다. 그런 엄마를 따라, 갑상선 질환 전문병원인 유외과*에 방문했다.

*유외과 : 유방, 갑상선 질환을 전문적으로 진단하고 치료하는 병원


의사 선생님은 내 목을 보자마자 염증이 심해보인다고 했다. 잠시 뒤 시작된 초음파 검사에서는 본인의 목에 기기를 가져다 대며 내 목과 비교해주었다. “아이고 많이 부어있네요. 보통은 혹만 까만색으로 보이는데, 지금 갑상선 전체가 까매져서 혹이 잘 안 보여요. 그래서 혹시 놓칠까봐 여러 번 확인하는 거예요. 다행히 혹은 없네요.” 이 정도로 부어있다면 기능저하증일 가능성이 높을 거란 말도 덧붙였다.


아침이면 늘 목이 잠겼고, 목에 무리가 갈 정도로 힘주어 이야기하는데도 사람이 많은 곳에선 목소리가 묻혔다. 무리해가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날이 많았고 그 끝에는 늘 피로감이 따라왔다. 이제야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았다. 심하게 부은 갑상선에 기도가 눌려 찌그러져 있었다.


갑상선기능의 이상 유무는 피검사 수치로 판단하는데, 검사 결과 갑상선 자극 호르몬인 TSH 수치가 15를 넘었다. 이상 유무를 판단하는 다른 수치가 두 가지 더 있지만, TSH만 보면 보통 4까지가 정상 범주라고 한다. 일단 제일 적은 용량인 0.05mg짜리 약을 45일 동안 먹어보기로 했다.



'그래도, 나 때문일까?'


의사 선생님은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내 생활습관과 관련한 이유도, 부모와 관련한 유전적인 이유도 아니라고 했다. 내 잘못도, 엄마의 잘못도 아니라고 여러 번 되뇌어주었다. 그저 ‘재수’의 문제라고, 재수가 좀 없어서 갑상선호르몬이 잘 만들어지지 않은 거라고 말했다. 처방받은 약 또한 비타민처럼 먹는 일종의 보조제라고 했다. 임신 전에도, 임신 중에도 먹을 수 있고 (산모가 기능저하증이라면) 오히려 태아의 발달에 도움되는 약이라고도 했다.


대체 왜 나야?’


어딘가 억울했지만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안심했다. 내가 잘못 살아서 아픈 게 아니라고 하니까. 하지만 안심한 나와는 다르게, 엄마는 내가 아플 때면 늘 말하던 그 레퍼토리를 시작했다.


“엄마가 너 임신했을 때 입덧이 심해서 잘 못 먹었거든. 그래서 네가 약한가봐. 철분약도 잘 챙겨 먹고 출산하고 모유수유도 17개월이나 했는데...”


엄마는 울상을 지었다. 혹시 모를 '잘못'만을 추측했다.


17개월이면 모유에 영양분도 남아있지 않을 시기지만, 잘 먹는 나를 보며 계속 먹였다고 했다. 뾰족한 이에 살이 뜯겨도 아픈 걸 참아가면서 말이다. 모유를 좋아하는 내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이 레퍼토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왜 그랬어”라고 반응했다. 단 한 번도 “고마워”라는 인사나 “그래서 지금 이렇게 건강한가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20대의 마지막 해를 맞이하고서야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엄마는 지금 내 나이 서른에 나를 가져 10개월을 꽉 채워 품고 있다가 이듬해 봄에 낳았다. 서른이 되고 보니 서른은 여전히 어린 나이다. 오빠를 스물일곱에 낳은 엄마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둘째를 낳은 서른도 여전히 어린 나이였다. 당장 몇 년 안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사실 두렵다. 아이를 키우는 내내 ‘그때 더 신경 썼다면 우리 아이가...’, ‘나 때문에 우리 아이가...’와 같은 생각이 떠나지 않을 것 같아서다.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엄마는 늘 못해줘서 아쉬웠던 이야기만 한다. 나는 엄마한테 받았던 사랑을 더 많이 기억하는데 말이다. 어릴 땐 이런 게 엄마라는 존재의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조금 들고 결혼과 출산의 적령기가 되고서야 아니란 걸 알았다. 엄마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엄마의 평생을 ‘미안해해야 하는 존재’로 만들어왔다. ‘엄마’에 대한 사회적 정의를 당연시 해온 나의 태도 또한 엄마의 미안함에 한몫했을 걸 안다.


그래서 엄마가 미안해할 때면 약한 모습을 보이는 내가 미워지곤 했다. 엄마를 미안하게 만드는 원인을 내가 제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아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라는 의사 선생님이 분명하게 말했으니까.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그러니 엄마, 내가 아프더라도 미안해하지 말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의 수많은 시간이 나를 위해 쓰였고 그 모든 순간에 당신은 최선을 다했다. 그렇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오늘의 나를 존재하게 한 이유가 바로 당신이다.




극심한 피로감, 추위, 식욕부진, 체중증가, 부종, 무력감, 감정기복 등 갑상선기능저하증의 증상은 다양하다. 나는 피로감과 추위, 그리고 식욕부진이 주 증상이었고 다행히 급격한 체중증가는 없었다. 오히려 살이 빠져서 기능저하증일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플라시보효과인지도 모르겠지만, 약을 먹고 일주일쯤 지나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느끼는 피로감이 달라졌다. 7-8시간을 푹 자도 오전 내내 따라왔던 피로감이 말끔히 사라졌다. 크든 작든 병은 알고나면 더 키운다는 말이 있는데, 이번에 만난 의사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상황이 더 안 좋아진 지금에야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연초에 다른 병원에서 TSH 수치가 8 정도 나왔다가 몇 개월 뒤 정상범주로 돌아왔다. 2016년 초부터 여러 병원에서 몇 차례 검사를 진행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초음파 사진이 왜 이렇게 까만지, 그런 증상이 왜 나타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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