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다. 항상 브런치의 존재는 폰 어딘가에 오롯이 놔두고 있었지만 쉽사리 접속하지도, 용기 내 무언가를 적지도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와 게으름, 나태라는 듣고 보면 뻔한 이유들이 컸다. 왜 그렇게 두려웠을까, 아니 단순히 글쓰기를 망설였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무언가를 적어야 된다는 압박감도 은근히 있었고 그만큼 이 공간을 채울 만한 지적인 능력도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갖은 핑계들로 방치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버렸다. 누군가가 볼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다시 좀 적어보려 한다. 부담감은 조금은 덜고 적고 기억하고 싶은 일들로 채우다 보면 이내 멀어 보였던 글쓰기의 즐거움도 다시 찾을 거라 믿는다.
떠나 있는 동안 신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30대라는 익숙하지도 않은 나이를 계속 먹어가고 있고 회사도 갑작스레 옮기게 됐다. 주변 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일상을 채우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는 멀어졌으며 새로운 사람들이 채워지기도 했다. 싸우거나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그런 건 아니지만, 한마디로 누구나 나이 먹으면 자연스럽다고 포장하는 그런 거리감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보이지 않던 어색함이 도드라질 때도 있고, 물리적 거리가 여과 없이 심리적 거리감으로 와 닿을 때도 있었다. '나를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잘해주기도 부족한 시간이다.'며 씁쓸히 포장했던 순간들이 또 스쳐 지나간다. 변했다는 걸 우리는, 아니 내 스스로가 용납하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참 변덕스럽고 뭐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인데 만나주고 무언가라도 챙겨주려는 분들이 있다는 건 참으로 복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이런 고마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게 맞는 건데 참 쉽지 않다. 그런 좋은 기운을 주는 분들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넘길 수 있지만 사실 그들이 주는 감정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쉽게 재단해서는 안되고 또 모른 척 넘어간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실례라고 생각한다. 우정에는 기브 앤 테이크가 무슨 소리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글쎄다,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기브 앤 테이크가 분명 존재할 수 있는 게 또 우리의 관계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어떤 교수가 본인의 친구를 언급하면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일 년에 두세 번 전화가 오는 수준으로 자주 보지도 못하는 관계라고 한다. 문득 전화가 오면 교수가 "무슨 일이야?"라고 물으면 친구는 "그냥...." "보고 싶어서, 궁금해서... 잘 지내나?"라는 답이 나오고 교수는 어김없이 또 용건을 물었다고 한다. "어, 잘 지내 근데 왜?" 그러나 친구의 답은 충격적이다. "나는 네가 늘 궁금하다. 보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잘 지낸다니 됐다~ 나중에 밥 한번 묵자" 그 친구의 대답을 듣는데 낯 뜨거울 정도의 무언가가 올라왔다. 아무 용건이 없는데 안부를 묻는 연락을 줄 때 한없이 밀려오는 친밀감이 느껴지는 게 첫 번째였고 왜 그런 걸 나는 누군가에게 바라기만 하는가라는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교수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만약 그 친구가 본인에게 부탁을 하면 어떻게 거절을 하겠냐고 되물었다. 최소한 인생 헛살지는 않았다는 뿌듯함과 친구에 대한 고마움, 친밀감이 그의 삶에 있어서 또 다른 활력소이자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교수도 그 친구도 참 빛나 보였다. 살면서 그런 관계를 만든다는 건 참 쉽지 않을 일이기 때문이다. 용건 없는 안부, 정말 당신이 궁금해서 보고 싶어서라는 그 숨은 메시지를 온전히 상대방에게 전달하기가 어디 쉬운 일일까. 어찌 보면 교수의 반응은 현대인들이 봤을 때는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다. '얘가 무슨 일이지?', '왜 전화한 걸까'라는 생각이 떠오르며 상대방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알지모를 긴장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 무언의 벽을 허문 친구의 말 한마디는 참 가벼우면서도 무겁게 와닿았다. 반성하고 실천해봐야겠다, 아니 노력해야 한다. 최소한 주변 사람들에겐 그런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또 누군가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는, 되도 않는 핑계는 이제 그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