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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성 Oct 06. 2020

오늘도 달려

93kg, 인바디 기계에 비친 숫자에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몸무게가 많이 나갔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실로 충격적인 성적표였다. 그동안 운동해라, 살 빼라는 가족들의 성화와 안 본 사이에 살 좀 쪘다는 주변 반응에도 시큰둥해하며 '한귀한흘'하기 일쑤였는데 숫자로 찍힌 몸 상태를 보니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오기가 먼저 샘솟았다. 결국 그 자리에서 한약 1개월치를 끊었다. 그렇게 시작된 두 달 간의 식단 조절과 한약 복용으로 몸무게도 조금은 빠지고, 요즘은 가벼운 운동도 병행하라는 의사의 조언에 달리기를 취미로 삼아보려 러닝화를 신고 종종 집 밖으로 나서고 있다.


주변에서 하는 뛸 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좋다는 말은 숨쉬기 힘들 정도로 괴로워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1분, 2분씩 시간을 늘리며 뛰다가 최종 목표는 30분을 쉬지 않고 달린다는 무시무시한 목표를 잡은 달리기 앱 프로그램에 따라 조금씩이나마 재미를 붙여가는 요즘이다. 그나마 계단만 조금 올라도 헉헉대던 저질 체력을 조금이나마 벗어난 것 같아 다행이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는 시점에 달리기 대회라도 나갈 수 있는 체력이 된다면 좋겠는데 요즘은 또 날씨가 추워져서 게으름이 샘솟고 있어서 문제다. 


근 몇 년 간 건강을 챙기는 것에 대해서 아직 젊은데 뭔 걱정이냐는 식으로 치부해버렸다. 대학생 시절 나름 75kg 나가던 무게가 93kg로 향할 때까지 그저 외면하기 바빴다. 그러다 결국 영양제를 하루에 한 움큼씩 챙겨 먹고, 달리다 보면 아파오는 무릎과 다리만이 남아버렸다. '내 몸'에게 죄스러운 생각이 든다. 길고 긴 통근길에 회사에서,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 요량이면 취미 없는 술보다는 야식이 최고였다. 치킨, 피자에 글에 담기 힘든 말로 험담을 배설하다 보면 그 시간만으로도 치유되는 것이라 넘겨버렸다. 그게 얼마나 스스로를 나태와 우울의 늪으로 빠트리는 줄은 생각지 않았다.


가벼워진 몸만큼 마음도 가벼워지는 요즘이다. 직원 휴업이라는 어려운 회사 상황 속에서 쉬는 날이면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게 하지만 한편으론 어디도 가기 힘들고 누구도 만나기 힘든 이러한 외적 여유(?)도 일생에 언제 겪어보겠냐는 생각이다. 사람을 싫어하진 않지만 그만큼 피로감도 많이 느끼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나름의 강제 은둔 시즌이 돼버린 것이기에 어떻게든 즐겨보려고 하고 있다. 앞서 얘기한 달리기나 등산, 올해 독립하면서 아기자기하게 볼게 많은 동네 산책 등 반경 5킬로는 넘지 않는 생활 반경이다. 누가 보면 참 너답게 재미없게 보낸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여행 못가는 것 빼고는 나름의 활력소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 브런치에 혼자만의 낙서를 쓰는 이러한 '부산함'도 그냥 갑자기 하고 싶어서였다. 회사에 갇혀 사람에 갇혀 방치하다 보니 무엇 하나 나만을 위한 일을 챙겨보지 못하고 달려왔다. 인생을 달렸다기보다는 그냥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겨 떠밀려 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언론고시 때 따르던 분이자 오랜만에 책으로 접하게 된 K님의 글을 읽다 보니 문득 여기에 끄적이고 싶어 졌다. 잊고 있었던 머릿 속 생각도 사회와 사람을 향하는 시선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그러한 글을 여전히 쓰고 계셨다. 물론 그분의 글에 담긴 생각이 훨씬 깊고도 유려하지만 왠지 모를 나랑 비슷한 부류라는 동질감(?)이 느껴졌다는 점에서다. 훨씬 연배도 있으신데 참으로 괘씸한 생각이지만 혼자서 동감하고 감동하면서 그랬다. 존경하고 따르는 분들에게 있어서도 표현에 숙맥이지만 일종의 일방향적인 팬심이랄까.


K님처럼 글을 잘 쓰고 싶다. 하긴 요즘에 쓰는 글이라곤 편견과 오만, 팩트라는 틀에 갇힌 냉혹함이 담긴 보도자료라 할 말이 없긴 하다. 어느새 삶의 중심에는 직장과 회사가 들어앉아 있으니까. 그렇다고 회사일을 능력있게 처리하고 애사심이 넘쳐서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냥 항시 돌아오는 시계추처럼 출퇴근하고 술먹고 하는 일상 속에서 떨어져 나간 체력만큼 생각도 종속돼버린 평범한 직장인의 삶, 오늘도 버틴 그 위태위태한 한가운데 어디쯤에 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추석 연휴 케이블 TV에서는 드라마 '미생'을 재방송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면서 인턴, 신입사원 때를 떠올리며 조마조마했던 나날들이 생각났다. 불안하기도 했고 서툴기도 했던 그때 그래도 고마웠던 선배들이 더 많았다는 감흥에 젖어들 무렵, 마지막 회까지 보고 나니 이제는 그러한 감정마저 무뎌져 버린 어쭙잖은 '대리'라는 직함만이 턱하니 훈장처럼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배울 것도 많은데 책임감까지 얹힌 상황이 편치만은 않다. 내일까지 처리해야 할 일도 문득문득 떠오르는데 한가롭게 떠들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웃기지만 그래도 내일의 일은 내일의 '이재성'이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또 어떻게든 24시간을 버텨내겠지라고 여기에다가 고백해본다.


내일은 또 생각지 못한 어떤 일상과 난관으로 하루가 채워질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를 잊진 말자고 다짐해본다. 참, 오늘 가을 옷도 샀다. 다이어트로 옷 사이즈가 줄어서라며 스스로에게 주는 나름의 포상의 의미로 손을 덜덜 떨며 결제했지만 후회는 없다. 이런 게 또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찾는 소소한 즐거움 아니겠는가. 나를 위해 문득 글을 쓰고 싶어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이제 나를 위해 나가야겠다. 밤바람이 추울텐데라는 생각은 잠시 잊고 가을밤을 느끼러 다시 뛰어 보자. 그러다 보면 75kg이라는 숫자도 성큼 다가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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