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자라고 있구나.
내 아이는 세 가지의 언어를 구사한다. 집에서 사용하는 한국어, 학교에서 수업할 때 사용하는 주언어인 영어 그리고 친구들과 놀 때 사용하는 독일어. 아이에게는 언어 스위치가 있는 것처럼 누군가가 영어로 말하면 영어로, 독일어가 들리면 독일어로, 한국말에는 한국말로 대답한다. 물론 제일 편한 언어는 한국어라고 하지만 수준이 그리 높다고는 할 수 없다. 적절한 단어를 모를 때가 많고 좋은 말로 하면 창의적인 표현이지만 조금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할 때도 있다. 최근 쓰는 어투로는 ‘사실’이 들어가는 문장을 자주 구사하는데 아이의 의도는 ‘나는 사실 그것이 하고 싶다.’라는 의미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실상은 ‘엄마, 나 사실 초콜릿.’ 같은 어색한 문장일 때가 많다. 맞춤법으로 가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골랐다’를 ‘골았다’라고 쓴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렇다면 영어나 독일어는 좀 나을까? 독일어는 유치원 때 배운 언어라 주로 친구들과 놀 때 사용하는 언어다. 딱히 어렵다고 한 적은 없었는데 학교에서 문법을 배우면서 흥미를 잃은 것 같다. 특히 동사의 어간과 어미를 따로 쓰는 분리동사를 배운 후에는 동사를 아예 분리를 안 시키려고 작정한 것 같다. 나는 배웠지만 배우지 않은 것이다, 하는 의지를 아이의 독일어에서 종종 느낀다. 영어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주언어이다 보니 독일어보다는 상황이 조금 낫다. 세 가지 언어의 고질적인 어휘력부족 문제가 떡하니 버티고 있긴 하지만 학년말 성적표에는 늘 잘 따라가고 있다는 평가가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바닥은 아닌 것 같다.
아이는 이제 4학년이다. 한국에서도 아이들의 공부가 갑자기 어려워지는 시기라고 들었는데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 친구 중에 한 명은 오빠가 4학년인데 오빠 숙제가 너무 많아서 자기는 4학년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단다. 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니 무엇이라도 준비를 시켜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이제까지 방학에는 내내 놀게 했는데 이번 방학은 마냥 놀면 안 될 것 같아 생각한 것이 ‘일기 쓰기’였다. 한 달의 절반은 한글로, 나머지 절반은 영어로 쓰기로 했다. 한글로 쓰던 한 달의 절반은 엉망인 맞춤법 때문에 엄마 마음은 절망이었지만 아이는 보람을 느끼고 재미있어하기도 했다. 문제는 영어로 일기를 쓰는 첫날 터졌다.
아이는 아주 자랑스러운 얼굴로 내게 일기장을 들이밀었다. 아이가 쓴 문장들은 대문자와 소문자가 어지럽게 제 맘대로 써져 있었다. 그걸 딱 보는 순간 내 마음도 같이 어지러워져서 아이에게 이걸 보라며 일기장을 손가락을 팍팍 튕겼다. 아이는 자신의 일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문장의 첫 글자는 대문자고 나머지 글자는 소문자로 쓰는 거 몰라?”
“알아.”
“근데 너 이거 뭐야. 왜 이렇게 썼어? 이제 4학년인데 어떡하려고 그래!”
나는 아이에게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아이를 마구 몰아붙였다. 아이는 금세 눈자위가 벌게졌고 연신 "엄마 미안해요."라고 했다.
“엄마, 빨리 쓰고 놀고 싶어서 그랬어요. 내가 최선을 다 해야 되는데 그러지 못했어. 엄마, 미안해요.”
“아니, 아직도 최선을 다해야 대문자, 소문자를 구분해서 쓸 수 있다는 게 말이 돼?”
아이의 변명은 나의 화를 더 부채질했다. 아이에게 무언가를 지적하거나 가르칠 때 이성을 잃으면 안 되는데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늘 아이의 잘하는 부분을 보려고 애쓰지만 이날만큼은 아이의 못하는 부분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아이는 긴장한 채 내 앞에 앉아있었고 아이의 일기장에는 내가 빨간색 색연필로 표시한 대문자와 소문자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잠깐 멈췄고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의 눈두덩이가 여전히 붉다. 아이의 붉어진 눈을 보자니 더 이상 아이를 앉혀 놓는 것이 무의미하다 싶었다. 아이의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 차 보였다. 엄마를 실망시켰다는 마음과 나는 왜 이런 것도 잘 못할까 하는 자책감이 보였다. 나는 그저 '이 정도는 틀리지 말아야지.' 하는 것이었는데 아이가 받아들인 것은 ‘이것도 못해?’ 였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엄마도 지나치게 말했어. 속상하다고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건데. 슬프게 해서 미안해.”
아이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나 한 번만 안아주면 안돼요?”
아이는 울음이 터지기 일보직전의 표정으로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물론이지, 하고 아이를 꽉 안아주었다. 아이는 아기처럼 내게 안겨 서럽게 울었다.
“엄마, 나도 잘하고 싶은데 잘 안돼. 아무 생각 안 하고 썼더니 그렇게 됐어. 이제 틀리지 않게 노력할게. 엄마, 미안해.”
아이는 내게 해명하고 설명하며 또 한참을 울었다. 괜히 미안하고 먹먹해진 나도 아이를 꼭 안고 한참을 달래 주었다. 아이가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닦고 여기저기 붉은 글씨가 쓰인 일기장을 덮어 자기 방으로 가지고 들어간 뒤 아이의 말이 메아리처럼 내 안에서 울렸다. 자기를 안아주면 안 되냐고 울먹이며 묻던 말이 수십 개의 조각이 되어 내 마음 안을 돌아다녔다.
2000년대 중반 프리허그 운동이 있었다. 거리에 누군가가 프리허그라고 팻말을 들고 서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가서 포옹을 한다. 사람들은 그 짧은 시간 위로와 공감을 받았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하는 포옹도 그런 효과가 있는데 엄마가 안아주는 것은 어떨까? 모든 것이 괜찮고 또 괜찮다는 의미일 것이다. 방금 엄마에게 예상치 못한 것으로 혼났지만 엄마가 나를 꼭 안아주었으므로 아이는 모든 것이 괜찮아졌을까? 아이의 마음을 가만히 헤아리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샤워하고 젖은 머리를 하고 나온 아이의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아주며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가 안아주면 모든 것이 괜찮게 느껴질 것 같았냐고. 아이는 엄마한테 혼난 것을 잊은 듯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난 엄마한테 안겨서 울고 싶거든. 엄마한테 혼나고 나서 엄청 울고 싶은데 안겨서 울면 엄마랑 사이도 좋아지는 것 같아서 좋아. 엄마가 안아주지 않으면 울음을 참아야 되는데 엄마가 안아주면 울 수 있어.”
“그렇구나. 그럼 이제부터는 또 이런 일이 생기게 되면 마지막엔 꼭 끌어안자. 그리고 조금 울고 다시 열심히 하자. 엄마도 네 마음 알았으니 언제든지 더 많이 안아 줄게. 엄마는 너 안는 거 정말 좋아해.”
인생은 항상 즐겁지 않다. 삶의 어려움은 늘 상대적이고 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그때 누군가를 안을 수 있다면, 내 몸을 맡긴채 폭 안겨서 온전히 나를 이해받는다고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다.
그래, 안아 줄게.
너를 많이 안아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