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럭이 들려주는 회사생활 이야기(1)
포트럭이 들려주는 이야기 : 회사생활 편입니다.
첫 회때 말씀드린 것처럼, 제 글은 크게 2 가지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요.
첫 번째가, 부동산 디벨로퍼 입장에서 부동산에 관심 있는 분들께 전문지식을 전달하는 글이구요,
두 번째가, 10년 차 직장인 입장에서 취준생 또는 신입사원 분들께 회사생활하며 겪었던 일들을 들려드리는 글입니다.
그동안 부동산 이야기만 쭉 해오다, 회사생활 이야기는 오늘이 처음이네요.
일단 하고 본 취업, 그러나 세상은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나는 회사생활 10년 차 직장인이다. 당초 취직에 생각이 없었는데 회사에 취직해, 그것도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일을 하며 이렇게 버젓이 다니고 있는 걸 보면 인생 참 모른다.
중학교 시절 교장선생님은 조회시간마다 늘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남자는 공대를 가야 한다고... 교장선생님의 동생은 공대를 나와서 기아차 사장이 됐고(정말 그 당시 기아차 사장님이셨다.) 자신은 문리대를 나와서 고작 중학교 교장이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그 말을 들었다면 잘 나가는 동생에 대한 질투심 정도로 치부하고 넘겼겠지만, 어린 나이에 인이 박히게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뇌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의 진로는 무조건 공대였고 다른 쪽은 생각지도 못했다. 다행히도 수학을 곧잘 했던 나는 이과를 거쳐 공대에 진학했다. 그런데 수업들이 너무 재미가 없었다. 고등학교 까지야 주위에 시키는 사람들이 많으니 얼떨결에 공부했지만, 대학교에서는 공부하라는 사람이 없다 보니, 그냥저냥 시간 보내면서 지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니 변리사를 공부하는 친구들이 눈에 보였다. 병아리 감별사는 알아도 변리사는 뭐하는 사람인지 몰랐는데, 알아보니 가장 소득이 높은 직업이라는 거다.(하지만 실상은 아니다. 인당 소득으로 따지면 변호사나 의사 등 우리가 아는 고소득 전문직보다 낮다.) 거기다, 특허 관련 업무라 공대생들에게 유리하고...
내가 뭘 하면 좋을지, 나의 적성은 뭔지, 나도 날 몰랐기 때문에 돈 많이 번다는 얘기에 변리사나 한번 공부해 보자고 결심했다. 휴학을 하고 매일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냈다. 공부가 잘 안돼도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에 앉아 있다가 마지막 셔틀버스를 타고 학교를 나서면 그냥 뿌듯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대학생활 중 기억에 남는 건 도서관에서 공부했던 것과 점심시간에 학교 광장에서 재즈 동아리 공연을 보던 것, 그리고 학교 축제에서 밤새 공연을 보던 것, 딱 세 가지다. (우리 학교 축제는 재미없는 걸로 유명하지만, 난 재미있었다.)
그렇게 공부를 해서 1차 시험에 합격했다. 문제는 2차 시험이었다 ^^;;
1차 붙고 2차 떨어지고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나이도 들고,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계속 공부만 하기도 불안했다.
그래서, 1차 시험에 합격한 상태에서, 일단 회사에 취직을 한 후 계속 공부를 하기로 했다. 회사 선택의 첫 번째 조건은 칼퇴근 가능 및 서울 소재 근무였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다.
당시 회사는 몇 년간 신입사원을 안 뽑다가 정말 오랜만에 채용을 실시하는 것이었고, 교육과정도 체계적으로 신설하면서 신입사원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
7월 1일에 입사해 6개월간 교육만 받았는데, 특히 3개월간의 합숙훈련은 거의 대학교 동아리 수준으로, 정말 재미있었다. 월급(신입 정규직 기본급의 70%)도 받으니, 이건 뭐, '회사가 참 좋은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정규 임용이 되고 부서 발령이 나면서 첫 번째 쓴맛을 보았다. 신의 직장, 심지어 신이 숨겨둔 직장이라고 회자되던 회사였지만 그것도 다 부서 나름이요, 상사 만나기 나름인 것이다.
중학교 교장선생님의 가르침(^^;;) 덕에 공학을 전공한 나는 R&D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에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시던, 대단한 카리스마의 기관장님(상무)이 계셨다. 유독 우리 부서만 야근에 주말 근무였다. 거기다 근무지도 대전이었다.
여기서 잠깐, 사실 대전 정도면 공대 출신치곤 선방한 편이다. 공대생들이 문과대 생보다 취직은 잘 되지만, 근무지가 주로 지방인 게 함정이다. 나도 그랬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근무지를 급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모든 게 서울/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발생하는 일이다. 서울에서 멀면 결혼하기도 어렵다. 부동산 개발의 관점에서 보면 서울 집중화 현상이 토지활용의 효율성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볼 수 도 있다. 하지만, 이는 지역 간 격차를 유발해 갈등을 증폭시킨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완해 수정 자본주의가 등장한 것처럼, 부동산 개발의 관점도 수정될 필요가 있겠다.
인턴기간에 틈틈이 하던 변리사 공부도 더 이상 하기 어려웠다.
하루는 퇴근하고 회사 사택에 누워 있는데 참 답답했다. 공부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이 됐다. 하지만,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다 보니, 그만 둘 용기도 안 생겼다. 그렇게 변리사의 꿈은 나에게서 멀어졌다.
첫 번째 업무를 맡다. 그런데...
정사원이 되고 처음 부서에 배치되던 때가 생각난다. 선배들은 다들 어려웠고, 부장님은 아버지뻘로 보였다. 아침마다 회의를 했는데, 정말 진지하게 대화가 오갔다.
선배들은 어제한 일과 오늘 할 중요한 일들을 보고했다. 이슈사항은 즉석에서 토론이 벌어졌다. 부장님은 예의 날카롭고 빠른 판단력으로 상황을 파악하셨고, 방향을 결정하셨다. 난 그냥 수첩 꺼내 놓고 메모만 했다.
'아, 이게 회사생활이구나.' 하고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부서 업무 파악하고, 잡일 하면서 며칠이 흘렀다. 부장님이 부르셨다. 첫 번째 업무를 주신 거다. 제품 디자인 관리업무였다. 대충 보니 별것 아닌 일이다. 속으로도 '설마 신입한테 중요한 거 시키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업무는 단순했지만 까딱 실수하면 대규모 클레임이 발생하는 일이었다. 원래 다른 부서 일이었는데, 그쪽에서 못하겠다고 던져서 억지로 받아 온 일을, 맡길 사람이 없어 두고 있다가 신입한테 그냥 시키신 거다.
디자인 하청업체 관리도 해야 하고, 다른 부서와 협업할 일도 많아, 하면 할수록 어려웠다. 특히나 수출제품이 문제였다. 한 번은 이란 수출 제품 때문에 대규모 클레임이 발생할 뻔한 적이 있다.
당시 패키지 제작업체가 바뀌었는데, 업체가 바뀌면 처음이다 보니 디자인이 틀리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제품 출시 전에 더 신경을 써서 디자인 체크를 한다.
디자인에 이상이 없어서 제품을 출시하고 배에 실었는데, 현지에서 연락이 왔다. 디자인이 잘못돼서 반품 요청을 한다는 거다. 그래서 다시 한번 확인을 해 봤지만, 도대체 어디가 틀렸다는 건지 알 수 가 없었다. 글로벌 부서 이란 담당자에게 연락을 해보니, 잠시 후 답이 왔다. 구석에 있는 이란어 글자 중에 점이 하나 빠져서 의미가 다른 말이 되었다는 거다.
사실 이란어를 보면 글씬지, 그림인지, 암혼지, 그냥 낙서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빠졌다는 점이 글자 중 일부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래서 발견하기가 더 어려웠던 것이다.
어쨌든 내 실수였다. 다행히 글로벌 부서 담당자가 사정사정해서 반품 없이 넘어갔다. 그다음부터는 디자인 샘플을 아예 판박이처럼 만들어서 대보면서 맞는지 확인했다.
그 후로도 상자의 크기가 안 맞아서, 색깔이 달라서 등등 여러 번 문제가 생겼다. (사실, 색깔은 인쇄 종이에 따라 같은 색을 칠해도 달라 보이며, 인쇄 초기/잉크 교체 전후/인쇄 마지막 무렵 등 프로세스 단계에 따라 조금씩 달라 보인다. 일정하게 맞추기가 참 어렵다.)
나의 실수로, 또는 업체의 실수로 몇 번이나 사고가 날 뻔했지만 어떻게든 해결방안은 생겼다. 주위 선배들의 도움이 컸다.
이렇게 나의 첫 번째 업무는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처럼 나를 긴장시켰다. 나중에 부서를 옮기며 이 일에서 손을 뗄 때까지 계속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