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통해 세상을 배우다

포트럭이 들려주는 회사생활 이야기(2)

by 포트럭

나는 대학생들에게 창업을 생각하든, 석/박사과정을 준비하든, 일단은 취업을 해서 직장생활을 경험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직장생활을 해야 비로소 사회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고, 자신도 모르던 적성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를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지식 습득뿐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보는 시각 등... 그래서 나는 회사가 고맙다. 오히려 내가 회사에 돈을 내고 다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입사 후 처음으로 중요한 업무를 맡다.

입사 초기의 일이다.


어느 날 카리스마 넘치시는 기관장님(상무)이 나를 직접 호출하셨다. 기관장실에 가보니 국장님(상무보)도 같이 계셨다. 신입인 내게는 너무나 높은 분들이라 정말 긴장됐다. 1편에서 얘기했듯 우리 기수는 오랜만에 뽑은 신입사원인지라 회사에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기관장님도 많은 기대를 하셨다.


기관장님은 따뜻한(하지만 날카로움이 숨어 있는^^;;) 눈으로 본인이 실무자 시절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구구절절 열변을 토하시며, 내게 각종 당부와 충고를 하셨다. 심지어 본인이 공부하셨다는 영문서적을 펼쳐, 색깔별로 줄 치며 열정을 불사른 흔적까지 보여주셨다.


그리고는 내게 중요한 업무를 맡기셨다. 우리 회사는 제품에 향료를 많이 사용하는데, 그중 가장 많이 쓰는 향료의 규격을 재설정하는 일이었다. 원료에서 향료를 추출하는 용매를 알코올에서 물로 바꿔 원가를 낮추고 안전성도 확보하는 게 주목적이다.


워낙 사용량이 많은 향료라 실험이 잘되면 원가절감액이 커 성과가 확실하기도 하지만, 섣불리 규격을 잘못 설정하면 제조공정상 문제가 발생해 손실만 커지는 중요한 일이었다.


통상 신입사원은 선배 업무 보조와 서무를 하며 1년 정도는 수련의 기간을 거친 후 가벼운 일부터 차근차근 맡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우리 본부에 배치된 신입들은 예외였다. 인턴기간 중 향후 배치될 부서에서 2달 정도 실무에 대한 집중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교육과정은 기관장님이 주도해 만들었는데, 기관장님은 이 과정만 거치면 당장 실전에 투입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상당하셨다. 때문에, 그 과정을 거친 나는 기관장님이 보시기에 실무능력이 갖춰진 상태였고(실제 그런지 여부는 중요치 않음^^;;), 그래서 바로 단독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서무 일도 따로 하지 않았다. 당시 나보다 몇 개월 앞서 배치된 선배가 서무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온 후로도 그 선배가 계속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향료는 협력업체를 통해 구매했기 때문에, 실험 또한 당시 향료를 납품하던 협력업체의 제조설비를 이용해야 했다.


그런데, 기관장님이 직접 협력업체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실험을 할 수 있도록 협조 요청을 해 줄 테니 나보고 그 회사까지 운전을 하라신다. 옆에 계시던 국장님도 덩달아 같이 가시겠다고, 본인 차로 가자고 오버를 하신다. 이렇게 해서 갑자기 국장님 차를 내가 운전해서, 기관장님과 국장님을 모시고 업체로 향했다.


우리 회사는 대전, 업체는 김포... 상당히 먼 거리였다. 그 당시엔 내비게이션이 보편화되지 않은 때라 지도를 보면서 가야 했다. 운전도 미숙했는데, 초행길이고, 거기다 회사 임원을 두 분이나 모시고 가니, 정말 엄청나게 긴장됐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몇 번 헤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두 분은 웃으셨지만, 난 정말 죽고 싶었다.


그렇게 왕복으로 8시간 가까이 운전을 했고, 회사 사택으로 돌아와 완전히 탈진했다.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중소기업의 현실을 체험하다.

실험 계획을 세운 뒤, 일주일간 협력업체에서 실험을 진행했다. 내 실험 계획서대로 업체에서 설비를 가동하고, 나는 계획대로 진행이 되는지 제조공정을 관리하면 됐다.


실험이라는 게 24시간 경과를 지켜보며 하는 것인지라, 그 기간 동안 나는 협력업체에서 그 업체 직원들과 함께 먹고 자며 생활했다. 자연스럽게 중소기업의 현실을 몸소 체험하게 됐다.


직원은 열댓 명 정도였다. 그중에는 외국인 노동자도 3명 있었고 병역특례 직원도 1명 있었다. 급여는 우리 회사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복지혜택은 거의 없었다.


숙소도 열악했다. 사무동 맨 위층이 숙소였는데 방이 2개였다. 외국인 노동자 3명이 한 방을 썼고, 다른 방에 병역특례 직원과 다른 직원 2명이 잤다. 그 방에서 나도 일주일간 신세를 졌다. 당시가 봄이었는데도 밤에는 외풍이 심해 추웠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왔는데, 자기 나라에서 대학까지 나온 엘리트 고학력자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현장에서 짐을 옮기고 청소하는 단순 노동을 한다. 그들도 해외취업을 꿈꾸며 희망을 가지고 왔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실험을 하다 보니 협력업체의 품질분석 담당자, 설비 담당자와 친하게 되었다. 둘 다 나이가 30대 초반이었고, 미혼이었다. 한 명은 10년 이상 만나온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결혼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급여가 너무 작고, 모아둔 돈도 별로 없어 여자친구 부모님이 탐탁지 않아한다고 했다. (당시가 10년 전인데, 그 직원의 월급이 170만 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같이 일해 보니, 두 사람 모두 업무능력이 우리 회사 직원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수도권 4년제 대학을 나왔고, 우리 회사(시가총액 20위 이내, 소위 말하는 대기업) 직원은 서울 소재 대학을 나온 것 정도 같다.


그때 절실히 느꼈다. 대학교 스펙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나뉘는 중요한 요인이고, 이렇게 갈리는 순간 인생의 격차가 심하게 벌어진다는 것을... 냉정하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이를 통해 난 두 가지 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첫 번째, "학력에 대한 문제"두 번째, "중소기업/대기업 간의 관계"에 대해서다.




첫 번째, 학력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학력을 중시할까?


내 경험에 의하면, 대학에서 배운 지식은 사회에 나와 별 쓸모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학교라는 스펙에 목메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나도 신입사원 채용심사에 가면 학교가 어딘지 관심 있게 본다. 요즘은 취업 스터디를 많이 하기 때문에 입사지원서를 다들 잘 써서, 변별력이 없기 때문이다. 어학연수, 입상경력, 자격증, 봉사활동 등 서류심사에서 점수를 받을 수 있는 항목들은 빼곡히 채워 온다. 서류만 보면 다들 만능에 엄청난 인재다.


문제는 서류상의 내용이 과장이 많다는 것이다. 칸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 낸 스펙도 많다. 이러다 보니, 채용 심사위원은 지원서 내용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 헷갈린다.


면접도 마찬가지다. 취업스터디를 통해 준비해 온 학생들은 기계적으로 모범답안을 얘기한다. 스터디의 초점이 회사생활 능력을 기르는 게 아니라, 취업을 위한 지원서 작성 및 면접 노하우 습득이다 보니, 괜찮다 싶어 뽑았는데 의외로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입들도 꽤 있었다.


면접위원 간에 사람을 보는 잣대도 제각각이어서, 지원자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면 결국은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공인된 기준인 학력을 중요한 요소로 보는 게 면접위원들 입장에서도 속 편한 것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간 사람은 그만큼 성실히 노력했다는 점을 인정해 주는 거다. 한편으로는, 제도권 교육에서 얌전히 말 잘 들으며 공부했으니, 회사에 와서도 큰 문제없이 고분고분 일 잘하겠다는 생각이 은근히 있는 거다.


과거에는 이게 맞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직화된 사회에서 성실히 일하는 게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요즘같이 다양성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입시공부만 줄기차게 한 사람은 매력이 없다.


회사 인턴제도를 적극 활용하는 게 취업희망자와 회사 모두에게 바람직하다.

회사에는 일찌감치 자신의 적성이 무엇인지 찾아서 그 분야로 매진한 사람이 필요하다. 채용도 검증이 어려운 서류심사와 면접으로 불안하게 뽑기보다 어느 정도 기간을 두고 평가를 한 후 뽑는 게 안전하다.


취업희망자도 인턴 경험을 통해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아 가고, 본인이 더 노력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회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입사했다가 기대와 달라 실망하고 퇴사하는 일도 방지할 수 있다. (참 안타까운 경우인데, 이는 취업자와 회사 모두에 큰 손실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여러 회사에서 인턴을 해보는 게 좋다.


우리 회사도 인턴제를 잘 활용하고 있다. 확실히 인턴을 거쳐 입사한 후배들이 회사에 적응을 잘하고 일도 빨리 배운다. 회사에 대한 충성도도 높다.


일부 대학 중에 인턴 참가자에게 학점인정을 해 주는 곳도 있던데, 이런 분위기가 더 확대되었으면 좋겠다. 회사도 인턴 규모를 더 늘려서 많은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회사 입장에서도 채용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두 번째, 중소기업과 대기업에 대한 이야기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우리나라가 경제도약을 하던 1960년대 이후, 대기업 중심으로 모든 혜택과 지원이 이루어지다 보니 지금까지도 경제가 대기업 중심이고, 중소기업은 이에 종속되는 관계가 형성된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대량생산과 원가절감이 중요하던 과거와는 다른 시절이 되었다. 소비자의 기호가 다양해지고, 사회적 가치도 함께 고려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덩치가 크고 관료화된 대기업보다 사회의 변화를 빠르게 읽고, 신속하고 창의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일이나 핀란드 등 선진국 사례를 봐도 그렇다.


그런데, 아무래도 중소기업은 대기업보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고, 조직의 시스템이 체계적이지 않다. 그래서, 일단 사회 초년생들은 대기업에 취업해야 한다. 이를 통해 사회를 배우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익히고, 창의적인 아이템을 발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런 다음, 마음껏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는 곳으로 옮겨야 한다. 창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말이다.


따라서, 대기업은 채용의 문을 대폭 늘려 사회 초년병을 위한 사관학교 역할을 해야 한다.


그동안 정부의 혜택을 받으며 성장해 왔으니,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차원에서라도 의무적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채용을 꾸준히 해줘야 한다.


숙련된 역량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중소기업으로 많이 가면, 회사의 펀더멘탈이 좋아지고 생산성이 높아진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급여나 복리후생 등 직원에 대한 처우도 개선될 텐데 말이다.


이러한 선순환 구조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렵고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관심을 보인다면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만약 회사에 취직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가 없었을 것이다. 회사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길러 준다. 그래서, 처음에 얘기했듯이 나는 회사가 고맙다.


참, 협력업체에서 했던 향료 실험은 무사히 마쳤고, 이를 반영해 원가절감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부서를 떠난 지 10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나에게 그 향료에 대한 문의가 온다. 기관장님 덕분에 정말 좋은 경험을 했다. 지금도 김포의 그 회사는 잘 있는지, 가끔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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