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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임민아 Dec 11. 2023

로봇청소기, 세탁기, 건조기, 식기세척기와 작전을

나는 참 좋은 남편이다(1)

아파트 공동체 활동하면서 주민들이 쓴 글을 엮어 에세이집을 만들고 있다. 총 12명이 글을 썼고, 다음 주 디자인과 인쇄를 업체에 맡길 예정이다.


남편에게 글 한 꼭지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하고 싶은 말을 다 적어도 괜찮겠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궁금해졌다. 어떤 내용이든 다 좋으니 쓰고 싶은 대로 써보라고 했다. (마음에 안 들면 편집할 때 빼버리면 되니까;;)


밤새 노트북 앞에 앉아 끄적이는 것 같더니 아침에 파일을 하나 던져준다. 제목부터 싸하다.

"나는 참 좋은 남편이다"


그래, 어디 한 번 읽어나 보자.




나는 집이 좋다


오후 5시, 퇴근을 서두른다. ‘007 제임스 본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에게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BGM을 깐다. 직장이 있는 인천 부평에서 파주 운정까지 한 시간 거리,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집에서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파주로 이사한 지 3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집에 가는 길이 이렇게 좋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집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현관문을 열고 능숙한 발놀림으로 신발을 벗으면서 동시에 아이폰 잠김을 풀어 IOT로 연결된 로봇청소기 애플리케이션을 실행시킨다. ‘꼼꼼한 청소’ 옵션으로 2회, ‘모든 방’ 청소 설정을 켜고 강도를 최대로 올린다. 로봇청소기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재빨리 거실과 방에 널브러져 있는 각종 잔당을 처리한다.


빨래 바구니에 있던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고 AI 세탁 기능으로 빨래를 돌린다. 식탁 위, 서재 책상 위에 올려놓은 컵을 수거한다. 그리고 주방 개수대에 모아놓은 그릇, 조리기구를 식기세척기에 넣고 돌린다. 식기세척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제인지 그저께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건조기 속에 잘 말려진 세탁물을 꺼내 정리한다.


나와 오래전부터 작전을 같이 해오던 동료들이라 손발이 척척 잘 맞는다.


혼자서 엄청난 작전을 펼치는 동안, 만 12세 딸내미는 아빠가 그러거나 말거나 소파에 누워 아이폰만 쳐다보고 있다. 딸내미도 내가 모르는 어떤 작전을 펼치고 있는 거겠지. 언젠가부터 아이폰 비밀번호도 변경하고 SNS도 별도로 관리하고 있어서 어떤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나와 아내에게 철저하게 접근금지를 명령한 상태이다.


사춘기라는 ‘시절악당’과 접촉을 시도하는 장면이 몇 차례 목격되기는 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사춘기 활동을 시작한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다. 주변에서는 딸에게 ‘그때’가 오면, 투명 인간 취급하라는 지침을 주었다. 한 공간에 있지만, 이렇게 따로 또는 같이 있을 수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집이 좋다. 집은 우리 세 식구에게 안전한 휴식처다. 가족이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다. 각자의 경험과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가장 평안한 장소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해 주며 더욱 끈끈한 가족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장소다. 종일 떨어져 지내다가 힘껏 끌어안는 순간에 가족의 유대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 공간이 좋다.




뭐지, 감동적인데;;

내 원고 뒤에 남편 원고를 붙였다. ㅎㅎㅎ

기특하네...

2편도 곧 소개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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