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 임민아 Jan 05. 2024

부엌책방 엘리씨의 빈자리

LAB430 프로젝트 종료(2023.08.23~2023.12.29)

엘리씨가 남기고 간 엽서, 마지막까지 감동을 주고 떠나는 사람


"빛, 민아씨!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감사한 공간에서의 시간이었어요. 매일 아침 이곳에서 마주한 많은 장면들이 생생해요. 나를 마주하고 나와 대화하면서 보낸 LAB430에서의 나날들이 인생의 한 컷을 장식했어요. 민아씨의 제안과 도움 없이는 결코 맞이할 수 없던 순간들이었어요. 이 실험을 통해 내가 얼마나 '책방'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지 그 애정과 꿈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꼭 초대할게요. 나의 '부엌책방'에!! 늘 긍정의 에너지를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2023.12
희망을 만난 김엘리


엘리씨와의 만남은 2022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역 온라인 카페에 '파주출판도시에서 독서모임 하실 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었다. 출판도시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소규모 독서모임을 열어보고 싶었다. 그때 만난 다섯 명의 멤버 중에 한 사람이 엘리씨다.


우리는 2주에 한 번 출판도시를 유영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엔 내 작업실에 모였지만, 파주출판도시에 입주한 출판사나 영화사가 운영하는 북카페를 투어 하면서 독서모임을 이어왔다. 파주출판도시 지혜의 숲 1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사계절출판사 40주년 기념 전시를 보러 가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미메시스아트뮤지엄에서 열린 프리다칼로, 쿠사마야요이, 버지니아울프 그래픽노블 전시를 관람하고 멋지게 단체사진을 찍었던 날이다. 파주라는 지역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여성들이 만나 친구가 된 것을 기념하는 사진이었다.


파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엘리씨와 미메시스아트뮤지엄에서


엘리씨는 성실했다. 만 2년 동안 모임에 거의 빠진 적이 없었다. 파주 금촌에서 출판도시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불편했을 법도 한데, 그녀는 불편함을 오히려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독서모임을 2년 이상 지속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엘리씨의 에너지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책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에너지를 충전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가진 특유의 사랑스러움으로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에너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엘리씨는 만날 때마다 반짝이는 눈으로 최근에 다녀온 책방 이야기, 책방에서 구매한 책 이야기, 그 책을 쓴 작가 이야기를 쏟아냈다. 마치 열여덟 살 소녀가 사랑에 빠진 것 같은 모습으로...




탄현면 빅테이블커피에서 독서모임하던 날 엘리씨. 이날 엘리씨를 보면서 배우 윤석화가 떠올랐다.

엘리씨는 주방 상부장에 그릇 대신 책을 넣어두고 부엌책방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그 얘길 처음 들었을 때 너무나 신선한 충격에 동공이 확장되는 기분을 느꼈다.


나에게 주방 상부장이란, 쓰지 않는 그릇과 접시를 가득 채워둔 창고 같은 것이었는데... 이 사람은 그 공간을 책방이라 명명하고 꿈을 꾸고 있다니!


나도 한때 동네책방을 찾아다니며 책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제주도 출장을 가게 되면, 동네책방 지도를 손에 쥐고 내달렸다.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을 만나는 재미, 운영자가 추천하는 책을 읽는 재미, 그곳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책을 사는 재미, 집에 돌아와 제주 바다냄새를 흠뻑 머금은 책을 펼치는 감동이 따라오는 재미가 있었다.


엘리씨가 부러웠다. '나도 마음껏 책방여행을 하고 싶은데...'


지난 여름, 명필름아트센터 1층 카페모음에서 엘리씨와 단둘이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고, 엘리씨는 그날도 우산을 쓰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판도시에 왔다.


우리는 책을 읽는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재난을 경험한 누군가의 아픔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그러다 엘리씨의 '부엌책방'을 밖으로 끄집어내보자는 제안을 하게 됐다.


"엘리씨, 우리 실험해 볼래요?"




지난해는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일이 많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손에 쥐고 컨트롤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편하게 일을 분배하지도 못했다. 특히 현장에 나가야 할 일들이 많아서 작업실을 비우는 날이 잦아졌다. 일주일, 보름씩 작업실을 비운 탓에 화초가 다 시들어버렸다.


3년 전 작업실을 마련할 때, 이곳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보고 싶었다. 누군가와 함께 책을 읽고, 서로의 감상을 나누고, 글을 쓰고, 책으로 엮는 일. 하지만 현생을 살아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나의 작업실에 들어가 앉아 있을 여유가 없었다.


작지만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공간으로 채워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엘리씨가 자꾸 생각났다.


열 평짜리 작은 작업실, 홀로 조용히 마음을 들여다보고, 흐트러졌던 나를 다시 올곧게 세웠던 장소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내가 충분히 쉬어갈 수 있었던 동굴이었다. 나의 공간에 엘리씨와 부엌책방을 초대했다.



"책이 좋은 건지, 책을 통해 만나는 사람이 좋은 건지, 책방을 하고 싶은 건지, 나만의 공간이 필요한 건지 실험을 해보고 싶어요."


설렘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엘리씨가 말을 꺼냈을 때, 내 심장이 벌렁거렸다. 나도 한때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들인 책으로 가득 찬 책방을 운영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의 마음을 탐구해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엘리씨의 부엌책방을 소환하기 위해 책장을 구입했다. 왼쪽 책장 열두 칸은 내가 좋아하는 책을 꽂아두었고, 오른쪽 책장 열두 칸은 엘리씨가 큐레이션 한 책으로 채워졌다. 


우리는 이번 실험에 LAB430이란 이름을 붙였다.




엘리씨는 역시 부지런했다. 매월 LAB430 운영 계획을 만들어 붙였다. 주말은 '철컹철컹' 문 닫는 날이고,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이곳에서 부엌책방을 운영했다. 


바빠서 잠깐 들르기도 힘들었던 나에게 우리 실험실 안부를 카톡으로 배달해 줬다. 내가 지난해 하반기를 잘 버틸 수 있었던 건 엘리씨의 'LAB430 뉴스레터' 덕분이다. 


카메라 들고 현장에서 헉헉거리고 있을 때 엘리씨의 사진 한 장이 큰 위로가 됐고, 힘이 됐다.


'고마워요, 엘리씨!'


LAB430 불을 끄고, 인사하는 엘리씨의 손




2023년 12월 29일, LAB430 운영 종료. 

총 4개월, 약 120일간의 실험을 종료했다.

엘리씨는 마지막 문을 닫는 날, 나에게 편지와 영상을 선물해 줬다.

고마운 엘리씨, 사랑스러운 엘리씨...




작가의 이전글 2024년 1월 1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